#15.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by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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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할 일이 없는 날이면 무작정 대학교를 찾아가 친구를 만들어 놀았다. 아름다운 지중해의 열기를 받는 학생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삶의 여유가 넘쳐 흘렀다. 공강 시간에 해변가로 달려가 수영을 하거나 태닝을 하고 돌아오는 건 기본이고,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해변도로를 달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학교 풍경이 생물학이라던가, 경제학이라던가 하는 전공을 배우러 온 학생들 같지 않고 마치 다이빙을 배우러 온 학생들 같았다. 내가 만난 친구들은 입고있는 차림새부터가 나시와 반바지, 쪼리와 선글라스가 기본으로 장착되어있었다. 그들의 한쪽 팔엔 백팩, 다른 팔엔 스케이드 보드가 있었다.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곳이 잠시 머물기에는 좋지만 무척이나 심심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졸업 후 몇년간은 이곳에서 일을 하지만 경력을 쌓은 뒤에는 영국으로 가서 일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인 삶의 풍경이 여유로웠기에 살기에도 좋을 것 같았지만, 지구상의 어떤 나라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안전하기는 한국 못지않은 나라이기는 하나 열정, 패기, 경쟁, 쟁취 등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나라이기 때문에 뜨거운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에게 휴양지로 둘러쌓인 이 나라는 잠시 거쳐가는 나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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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사는 많은 이들은 좋게 말하면 여유로웠고, 나쁘게 말하면 느리고 게을렀다. 노는 것만큼은 이 친구들과 평화롭게 잘 놀았지만, 나는 행정 절차를 밟고 있었기에 한없이 느리기만 한 이 시스템이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교육부로 갔을 때 내 서류는 한 스텝 더 나아가있긴 했다. 차근차근 프로세스를 밟고 서류상의 절차가 완료되면 자격증 발급이 되고 대학병원으로 가서 일정 기간동안 일을 해야한다. 그런 후에 영국이나 유럽내 다른 나라로 가서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서류상의 절차가 완료되기 까지는 조금 오래 걸리는 듯 했다. 교육부 담당자는 내게, 이 절차는 오래 걸리는 프로세스니, 두달 후에 다시 몰타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래도 절차가 진행이 되고 있고 두달이라는 시간이 생겼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조금씩 길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두달의 시간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낼름 유럽 저가항공의 비행편을 찾아봤고, 30유로에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편이 있었다.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탈리아로 날아가기로 했다. 로마와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는 가본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엔 친퀘테레와 피사를 가볼 작정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산티아고 순례길로 정했다. 약 한달간 다른 유럽의 나라들을 거쳐 여행한 후 남은 한달엔 순례자의 길을 걸을 계획을 짰다. 몰타의 자격증을 받을 수 있긴 했지만 이왕 들리는 나라들의 자격증 시스템 또한 알아보고 싶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계획에 집어 넣었다. 다음 날 나는 로마 레오나르도다빈치 공항으로 날라갔다. 로마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피렌체로, 피렌체에서 친퀘테레로 가는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친퀘테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도시였지만 이 글에서 도시 하나하나의 경험을 모조리 적는다면 몹시 지루하고 뻔한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굵직굵직한 스토리들 위주로 글을 써나가려한다. 고로, 재미없는 자잘자잘한 이야기들은 스킵할 생각이다.)


CinqueTerre1-7aee8df9b583431980dd08b5fdd09945.jpg Cinque terre, Italy


친퀘테레에서 일주일 간의 시간을 보낸 후 피사를 보러 갔다. 피사는 정말 '피사의 사탑' 딱 하나 밖에 볼 것이 없다고 해서 그것만 재빠르게 보고 가려고 했다. 피사의 사탑 근처를 가니 전세계에서 이 구부러진 사탑을 보러 온 모든 사람들이 이런 자세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독일이든 아르헨티나든 사람은 다 비슷한 생각을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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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전세계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조금이나마 다른 포인트를 줘보려고 했지만 결국 결과는 비슷했다. 사진을 찍고 나는 공항으로 향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비행이 다음 날 새벽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은 최고의 노숙 장소다. 공항의자에서 침낭을 피고 누울 때면 그렇게 안락하고 편안할 수가 없다. 공항에 도착하고 머리를 누일 적당한 의자를 찾는데 이 의자들이 한줄로 연결이 되어있는 의자가 아니라 한칸씩 팔걸이로 나뉘어져 있는 의자밖에 없었다. 각국의 공항마다 다른 컨셉의 의자들을 가져다 놓긴 하지만 이런 의자를 만나면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자던가, 구석으로 들어가 공항 바닥에 누워 자야 한다. 나는 공항 전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봤지만 마땅히 몸을 누일 곳이 없었다. 공항 자체가 작기도 했었다. 할 수 없이 그나마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구석으로 들어가 자리를 폈다. 자리를 피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과 양치를 했다. 노숙을 할 때 하더라도 청결은 필수다. 로션을 바르고 깔아놓은 침낭 안으로 쏙 들어가 누웠다. 약 30분 정도 선잠이 들 무렵 공항직원이 내게 찾아왔다.


"미안한데, 우리 공항은 12시에 문을 닫을거야. 여기서 자면 안되고 밖으로 나가야 해."

"응?? 공항이 문을 닫는다고?"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항노숙을 하기도 했지만 공항이 문을 닫는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어 몇번이고 재차 물었다. 지금 밖에 나가면 너무 추워. 공항이 문을 닫는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 조금만 있으면 비행 시간이란말이야. 이런 말 저런 말 다 갖다 붙이며 사정을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미안. 나가줘, 였다. 약 4시간 후면 탑승을 해야 하는데 이 4시간 동안 문을 닫는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의 룰에 따를 수 밖에.


10월의 피사는 쌀쌀했다. 나는 다시 노숙을 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공항 게이트는 닫히고 불이 꺼졌다. 새벽 비행이 있는 다른 탑승객들 또한 나 처럼 쫓겨났다. 공항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마침 돌로 된 벤치가 보였고 그곳에 침낭을 깔았다. 피사의 밤 하늘을 보며 다시 침낭에 들어갔다. 작은 마을의 공항은 문을 닫기도 한다는 걸 배웠지만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내 잠에 빠져들었고, 약 3시간 후 일어나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탑승준비를 했다. 그리고 몇시간 후 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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