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다 그렇지 뭐
말라위에서의 생활은 대체적으로 여유로우나 자칫 잘못하면 여유로움이 외로움이 되어버린다. 저녁 6시면 길거리의 불이 꺼지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여러 엔지오 단체에서 파견 나온 단원들과 함께 어울려 놀거나 수다를 떠는 일이 그나마 외로움을 달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길 없는 외로움은 나를 자주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집 앞에 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지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친구들과의 추억도 떠올랐고, 한국에 있는 가족도 생각났다. 얼마나 큰 일을 하겠다고 이곳까지 와서 이러고 있을까. 외로움은 공허함을 만들고, 공허함은 회의 섞인 시선을 가져다주었다. 무엇이 그토록 공허했을까.
친구들은 미국과 캐나다로 건너가 인턴십을 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깨끗하고 빛나는 덴탈 체어 옆에서 당당하게 찍은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내가 일을 하는 공간을 생각했다. 내가 꿈꿔왔던 덴탈 체어와는 많이 동떨어져있었다. 여기 있는 것이 맞는 걸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맞는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면 모든 상황과 환경에 회의가 몰려왔다. 그렇게 공허함에 빠져 어두운 밤 길을 걸어 다니던 그 날, 사건은 벌어졌다.
내가 집 밖을 나선 건 저녁 7시였다. 한국으로 치면 꽤나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나는 그나마 불이 켜져 있는 시내로 나갔다. 말라위에 머문 지 7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기에 웬만한 동네는 다 꿰고 있었고, 저녁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별다른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한 마디로 안전불감증에 걸려 있었다. 시내를 걸었다. 군데군데 불이 켜져 있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어두웠다. 시내 뒤편에는 흙이 깔려있는 넓은 공터가 나왔다. 그 공터에서 말라위 사람들은 차를 가져와 음악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술을 마셨다. 우리에게도 불금이 있듯, 이들에게도 불금이 있었다. 이곳은 말하자면, 말라위판 야외 클럽인 셈이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클럽에 갔지만 그렇지 않은 스트릿 아티스트들은 이곳에 모였다. 이곳 분위기는 꽤 괜찮았다. 날 것 그대로의 말라위를 보여주는 듯했다. 한 바퀴를 돌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넓은 공터라 음악을 아무리 크게 틀어놔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았다. 춤을 추는 남녀 사이로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목에 나무 상자를 걸고 돌아다녔다. 나무 상자 안에는 담배가 종류별로 들어있다. 사람이 부르면 달려가 담배 한 까치를 주고 100원을 받는다. 옷은 구멍이 나있고 신발은 한 짝만 신고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잠잘 곳이 없어 풀 숲에서 잠을 잔다. 한 둘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아이들이 이렇게 살고 있었다.
야외 클럽을 즐기는 사람들과 담배 파는 아이를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밤 9시가 다되어갔고 짙은 남색 하늘에는 청초한 달이 떠 있었다. 집으로 가려고 평소 다니던 길 쪽으로 걸었다. 지름길이었고, 갈색의 무성한 잡초들 사이를 지나야 했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왼쪽으로 돌아야 하는 코너가 보였다. 코너 뒤에서 사람 두 명이 나왔다. 별 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앞을 걸었다. 그 두 명과 내가 옆으로 지나가는 순간 한 명의 팔이 내 허리를 붙들었고 나를 넘어트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를 넘어트린 놈은 내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게 뒤에서 꽉 붙잡았다. 엎치락뒤치락 거리며 팔꿈치로 뒤에 있는 놈의 얼굴을 찍었다. 내 손에 붙들린 핸드폰은 플래시를 켠 채 콘서트의 조명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다른 한 놈이 발버둥 치는 나를 보고 칼을 번쩍 들었다. 커다란 마체테(코코넛 자르는 칼)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칼로 나를 내려 찍으려는 듯 왼 손으론 내 얼굴을 잡고 오른손으로 내려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발버둥 쳤다. 그는 자칫 잘못하다간 같은 팀을 내려칠 수도 있을 것 같아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내 눈 앞에선 커다란 칼이 위아래로 왔다 갔다 했다. 내 얼굴을 조준하는 것 같기도 하고 팔을 조준하는 것 같기도 하는 마체테가 바람을 훅훅 가르며 나를 위협했다. 그대로 목이 잘려 죽거나, 팔이라도 하나 잘리거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 짧은 몇 초 안에 수십 가지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 부모님, 친구들, 치과, 여행, 꿈, 미래 등.
나를 조준하던 놈은 그 큰 칼로 내 머리 옆 바닥을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심장도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칼을 재빠르게 다시 들고 또 위아래를 조준했다. 나는 쥐고 있던 핸드폰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한 번 더 내려치는 듯 한 모션을 취하더니 내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밟고 핸드폰을 주워 도망갔다. 나를 뒤에서 안고 있던 놈도 그를 따라 재빠르게 도망갔다. 심장은 벌렁벌렁 거리고 숨은 가파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야이 개$#@들아!!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배를 순간적으로 가격 당하고 꽉 붙들리고 있어 그런지 쇳소리만 흘러나왔다. 나는 옆에 있는 주먹만 한 돌을 들고 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눈 앞에 뻔히 보이게 달려가는 놈들을 그대로 보내기 싫었다. 비틀거리며 쫓았지만 그들이 사라진 곳은 어두컴컴한 어느 골목이었다. 거길 들어갔다간 정말 위험하겠다 싶어 더 이상 따라가지 않았다. 그 옆에 경찰서가 있었다. 경찰들에게 설명을 하고 같이 골목으로 돌아왔다. 경찰들은 총을 들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도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 또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를 위협할지 몰랐다. 경찰들에게 그만하고 돌아가자고 했다. 잡는 건 무리일 것 같다고 했다.
경위서를 대충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잡힐 거란 기대 따윈 없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방금 전 일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눈을 감을 때마다 마체테가 얼굴 위로 떨어졌고 허리가 콱 잡히는 느낌이 떠나질 않았다. 끔찍하고도 생생한 느낌이었다. 트라우마는 한 달가량 지속됐다. 병원 외엔 아무데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바깥 세상이 조금만 어두워져도 두려움이 찾아왔다. 현지 사람들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팔이라도 하나 잘렸다면 지금 내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목이 잘려 죽었다면 내 가족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고작 핸드폰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곳. 이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은 이 사건 이후로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