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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Oct 09. 2020

#62.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

인생이 다 그렇지 뭐



푹푹 빠지는 설산을 장시간 걷는 건 지치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금방 미끄러지고 넘어졌다. 그에 따른 체력 소모도 장난이 아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길은 쓰레기로 뒤덮인 것 같았다. 마치 군인들이 눈을 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쓰레기라고 하듯, 내 눈 앞에도 하늘에서 버려진 쓰레기들이 앞을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사진으로 볼 때야 그저 아름답고 저 공간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겠지만 그날의 기록을 찾아보니 역시나 욕으로 가득 차있다. 끝나지 않는 눈과의 싸움은 언제까지 계속될런지. 제발 맨바닥을 밟으며 걷고 싶다. 미끄러지지 않고 싶다. 똑바로만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발이 그만 젖었으면 좋겠다. 엉덩방아도 그만 찧었으면 좋겠다. 엉덩이가 그만 젖고 싶다. 지겹다. 지겹다. 지겹다!!!! 눈이 너무 지겹다. 대강 이런 내용에 육두문자가 섞여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의 효용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물이 없을 때 눈을 녹여서 먹을 수 있으니(실제로 그렇게 마시기도 함) 사막에서와 달리 5리터의 물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또 눈으로 덮인 내리막이 펼쳐진 길에선 매트를 썰매삼아 한번에 빠르게 내려갈 수도 있다. 그래서 엉덩이가 다 젖는 것...


무튼 하루 이틀 설산을 걷는 거야 새하얀 겨울왕국을 잠시 즐기고 내려오면 끝지만 이 길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주, 삼주, 한 달을 매일같이 설산을 걸어야 했다. 계속 눈 위를 걸으니 신발이 마를 틈이 없었다. 그나마 저녁에 모닥불을 피우고 말리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한 눈을 팔다가 신발 끈을 다 태워버렸다. 끈 없이 너덜너덜한 신발로 설산에서 하이킹을 한다는 건, 할많하않.


높은 고지를 계속 걷다 보면 Gps가 터지지 않는 구간이 나온다. 나와 승규의 핸드폰에서도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피씨티의 길이 모두 눈으로 덮여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Gps가 되질 않으니 앱도 볼 수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사람의 발자국을 찾아 걷기 시작했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겠나. 금세 길을 잃고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길을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사람의 발자국이라 생각하고 따라간 길은 우리를 더욱 음습한 곳으로 이끌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몇 하이커가 길을 잃고 실종되거나, 사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길을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주저앉았다. 눈으로 덮인 길과 먹통이 돼버린 Gps에 화가 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렀다.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텐트와 침낭, 며칠간 버틸 수 있는 먹을거리가 있어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멘탈은 붕괴된지 오래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산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눈 바닥에 매트를 깔고 누웠다. 하늘을 봤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힘만 빠졌다. 예민한 상태에서 서로를 건드려봐야 어떤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누워서 그렇게 하늘만 바라봤다.


조금 쉼을 가진 후 다시 길을 찾기 시작했다. Gps가 터지길 바라면서 움직였다. 어느 순간 신호가 잡혔고, 우리가 위치해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살았다!!!! 우리는 트레일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다시 복귀 하려면 절벽 같은 곳을 기어올라야 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단단히 박혀있는 돌을 손으로 잡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흙무더기들이 와르르 밑으로 쏟아졌다. 없던 길을 만들어내는 일은 고역이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영 산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드디어 절벽을 올라 트레일로 보이는 길에 합류할 수 있었다. Gps는 터지지 않았지만 이 길이 트레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가 넘어야 할 고개는 Kearsarge pass라 불리는 고개였다. 2시간은 더 걸어야 했다.


드디어 Kearsarge pass를 찾았다. 이제 하산하기만 하면 마을로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마을이라니. 문명세계가 너무나 그리웠다. 패스를 넘을 때 우리를 이렇게 개고생 시킨 패스에게 엿을 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지만, 당시에는 정말이지.... 얼마나 고생했으면 산에게 엿을 먹이겠나. 내 마음을 십분 이해해주시길.


잊을 수 없는 Kearsarge pass
Forester pass




설산을 걷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북캘리포니아를 걸을 때였는데, Gps가 잘 터지더라도 워낙 길이 유실된 곳이 많다 보니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었다. 앱에 나와있는 화살표만 보고 찾아야 하는데 그 화살표가 가시덤불을 가리키고 있으면 정말이지 답이 안 나온다. 이 거대한 덤불을 뚫고 앞으로 가라는 소린데, 오망불망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덤불 속으로 들어간다. 덤불 속에 있는 나무들은 탄력이 세서 내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밀면 그대로 밀리지 않고 되려 나를 다시 뒤로 밀거나, 회초리처럼 찰싹 때리기도 한다. 파릇파릇한 잔가지와 가시들은 그들을 뚫고 들어가려 하는 내 팔과 다리에 흔적을 남긴다. 덤불을 뚫고 나오니 온 몸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그날도 여전히 지독한 눈과의 사투 때문에 우리 모두는 지쳐있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에너지바를 먹고 있는데 반대편 산에서 주황색 해먹이 보였다. 그 옆에는 캠핑을 하러 온 듯한 사람들이 눈 위에서 썰매를 타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Hello~~~~~~~~~~~. 소리 지르는 나를 발견한 듯 그들에게서도 답이 돌아왔다. Hello~~~~~~~~~~~.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다시 Hi~~~~~~ 를 외치면 그들도 다시 Hi~~~~~~ 를 외쳐주었다.


저들을 만날 거란 기대도 없이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고, Gps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있던 곳의 반대편인, 주황색 해먹이 걸려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아시안 가족이 캠핑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아주머니는 내게 영어로, '저기 반대편에서 인사한 사람들이 너희가 맞니?'라고 물었고 우리는 그렇다고 했다. 이것저것 대화한 후에 아주머니는 So.. what is your nationality then?라고 물었다. 나는 We came from S.Korea!라고 말했고, 아주머니는 헉! 그럼 한국말할 줄 알아요? 라며 한국말로 물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한국분들이시구나. 우와 엄청 신기하네요!!!


그분들은 교포셨고, 가족끼리 Day hiking을 오셨다고 했다. 이런 첩첩산중에서 같은 피가 흐르는 동포를 만나다니! 아주머니의 눈빛과 우리들의 눈빛 사이에서 뭔지 모를 감동이 느껴졌다. 그분들은 우리를 초대해 그리웠던 한국 음식인 김밥과 알타리 김치, 미소국, 멸치, 고추 등을 내어주셨다. 몇 주째 느끼한 미국 음식만 먹다가 맛보는 한식은 그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우리는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걸어왔고, 캐나다 국경까지 걸어가는 피씨티를 하고 있다고 설명을 해드렸다. 가족 중에는 난생처음 하이킹이란 걸 해보셨던 누님도 계셨는데, 첫 하이킹에 이런 대단한 사람들을 만난 것이 행운이라며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해주셨다.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신발끈이 묶여있지 않은 내 신발을 보시더니 신발이 왜 그러냐고 물으셨다. 나는 며칠 전에 불을 피우고 신발을 말리다가 끈을 태워먹었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짐을 뒤적거리시더니 내게 분홍색 끈을 주시며 이거라도 괜찮으면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사용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분홍색이든 연두색이든 무슨 상관이랴, 감사하다고 하고 넙죽 받았다. 오랜 시간 여행을 하다 보니 별별 경험을 다 겪는데, 이렇게 전혀 기대치 않은 곳에서 같은 한인을 만날 때면 온 몸에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른다. 지금까지도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분명 이들 가족에게도, 우리에게도 뜻깊은 만남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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