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우리, 제주도에 내려가서 살까?
오랜 병상 휴직을 마치고 회사로 복직을 결정한 것은 나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결정이었다. 나에게 빌어먹을 암이란 불행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시작이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내가 쓰러지거나 아파서 며칠 못 나와봐야 일을 그만 시키지. 사람을 너무 갈아 넣는 거 아냐?"
일이 한쪽으로 몰리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별 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 주변 동료들에게 꽤나 많은 실망을 하던 터였다. 안쓰럽게 바라봐 주는 것 같지만,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고 그냥 저 멀리서 불쌍해서 어쩌냐는 눈빛만 잔뜩 하고 있는 동료들. 어쩌겠니 네가 제일 잘 아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네가 조금만 더 고생하자. 내 사수는 본인 일도 아니면서 항상 함께 곁을 지켜주는 자상함을 한 껏 발휘중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사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나는 내 동료들을 서운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미워하지는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서운할 것도 없다. 그들이 잘못한 건 없었다. 그래도 내 처지가 이렇다 보니, 화살을 쏠만한 곳이 필요했고 그때는 그게 나의 동료들이었다. 여하튼, 이런 모든 상황들을 보면서도 별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 싫었고 제발 하루만이라도 걱정 없이 편하게 쉬고 싶었다.
회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내가 없어지더라도 어제와 같이 또 하루가 흘러갈 것이다. 내가 업무를 못한다고 해서 일정이 지연되거나 회사가 큰 타격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내 업무를 대신해야 하는 내 동료들에게 많은 짐이 지워지게 되겠지. 그래도 나는 한번쯤, 회사에서 바람같이 사라져 주변 동료들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당해보라지. 그러게 처음부터 대안을 잘 마련해 뒀음 됐잖아. 숨어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킥킥대고 꼴좋다는 얼굴을 하고 싶었다. 새벽 퇴근길마다 택시 유리창 너머로 흘러가는 쓸데없이 밝은 가로등을 보며 저주를 퍼 붓기 일쑤였다. 집에서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아침 일찍 출근길에 오르면서도 좀처럼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하루하루 나를 스스로 갉아먹으면서 암이란 녀석을 키워갔다.
이 모든 게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회사는 가족들처럼 나의 상황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는 곳이 아니다. 경쟁해야 하고,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한 발짝 더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내 주변 동료들이 잰걸음으로 회사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경쟁과 스트레스가 존재하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겁이 났다.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암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환자처럼 지내왔던 집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이제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하다는 일상이 나에게는 지옥 불 구덩이 같은 무서운 곳이었다.
"다녀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그만 두자. 둘이 제주도에 내려가서 조용히 살면 되지."
내가 일상으로 한 발짝 발을 내밀 수 있게 해 준 건 아내의 응원 덕분이었다. 해 보고 안되면 말자. 애쓰지 않아도 돼. 아내의 별것 아닌 것처럼 툭 던져놓은 위로는 마음을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안되면 말지 뭐.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해보고 안 들어주면 말지 뭐. 아내의 조언대로 대책 없어 보이는 저런 마음가짐을 가지는데 까지도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한번 저렇게 마음먹고 나니 정말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겁은 조금 났지만.
암을 선고받고, 우리끼리 울고불고, 수술하고, 항암치료받고, 재활했던 이 시간만큼 힘들겠어? 성과 좀 못 내면 어때, 진급 좀 못 하면 어때, 동료들한테 폐만 안 끼칠 정도면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아. 이런 소꿉놀이 같은 역할 놀이랑 내 목숨이랑 바꿀 순 없잖아. 복직을 한 달 정도 앞두고는 주문처럼 이런 생각들을 곱씹고 다녔다. 매일 밤 눈을 감으면 니탓 내 탓과 한숨으로 가득 찬 사무실, 싸르르 아려오는 배를 움켜쥐고 낑낑대던 사무실의 화장실, 서로 민감하게 말을 주고받는 동료들의 목소리, 때때로 나에게 심한 말을 하던 그 썩을 놈.(그놈은 아마 기억도 못할 거다. 나는 돌 맞은 개구리라 기억하는 것이고) 그 모든 풍경들이 머릿속을 뒤집어 놓고선 곧장 가슴으로 내려와 심장을 흔들어댔다.
솔직히 복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이나 쓰고 좋아하는 사진이나 찍으며 그동안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나 자신을 조금 더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망가져버린 내 인생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었다. 지금 이게 나의 일상이길 바랬다. 복직을 하더라도 금방 스트레스 때문에 더 이상 못 다니겠다며 빨리 포기하게 되기를 바랐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되겠다고 하는 건 아무래도 조금 비겁해 보이긴 하니깐.
그럼에도 나는 복직을 반드시 해야 했다.
내 인생이었지만, 내 가족들의 인생이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나의 누나. 나의 아내. 지금까지 내가 스스로 갉아먹은 내 인생 때문에 헌납한 그들의 인생도 있었다. 내가 그들을 안아주고 치유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잘 사는'것이었다. 평균으로 돌아가는 것. 남들처럼 사는 것. 일상으로 돌아가 보는 것. 이제 내가 그들을 보듬을 차례다.
스트레스는 받지 않는다.
힘들면 관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