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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vid Jan 20. 2021

여보, 우리 제주도 가서 살까?

내려가면 백수인데 괜찮아?

항암치료를 다 마치고 회복에 여념이 없을 때, 내 눈에는 어딘가 모르게 자신감이 없어 보였나 보다. 겉으로는 복직해야지. 할 수 있어.라고 다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내 마음속은 온갖 걱정거리들이 정리도 되지 않은 지금 우리 집 거실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복직해야만 했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제주도 내려가서 살까?


아내는 내 마음속의 모든 짐을 끄집어 내서는 보따리 한 곳에 욱여넣은 다음 제주도로 던져버렸다. 저 말 한마디가 내게 주는 위안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리고 저 말 한마디가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우리 인생에 무슨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왜 제주도였을까.


막연히 도시의 걱정과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장소가 아마도 제주도였나보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이 현실의 물리적 위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 가장 자연을 만끽하며, 유유자적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은 곳. 그냥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로망 같은 장소. 아내와 나에게 제주도는 그런 곳이었다.


제주도에 내려가서 생활하면 정말 좋겠지. 바다도 보고, 산도 보고, 유유히 산책도 하며 건강도 챙기고, 좋은 공기도 마시며 좋은 생각들로만 머리를 가득 채우면 좋겠지. 그렇게 내가 스트레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제주도의 번화가 말고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조용히 살면 참 좋겠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려 테라스로 가지고 나가 아내와 모닝커피를 마시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동네를 한 바퀴 거닐며 아직도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또 꺼내어 보며 깔깔대어 본다. 동네 이곳저곳을 쏘다니다 지쳐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집에 도착해서는 어제 사다 놓은 반찬거리들을 다듬으라는 아내의 말에 자신 있게 재료들을 손질하다 괜시리 아내의 핀잔을 받는다. 내가 잘했네. 이거 원래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야. 대들어 보지만, 애초에 내가 이길 수 있는 주제가 아님을 깨닫고 억울함을 머금은 채 다시 아내가 시키는 대로 남은 재료들을 마저 손질해 본다. 아내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거실을 조금 치우고 식탁을 행주로 스윽 닦는다. 익숙하게 아내를 힐끔 쳐다보고 나선 요리에 전념이 없는 아내를 확인하고 슬그머니 행주를 싱크대 옆에 툭 던져놓는다. 큭큭. 점심식사가 완성될 동안 아내 옆에 멀뚱멀뚱 서서 창 밖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정말 오길 잘한 것 같다고 뿌듯하게 이야기해 본다. 아내는 이내 슬쩍 미소를 보이는가 싶더니 국이 간이 안 맞는다며 소금통을 이리저리 찾는다. 그렇게 준비된 점심을 먹으며 아침에 다 못 꺼낸 이야기들을 몇 개 꺼내어 같이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나타나지 않던 파리들도 식사를 하러 식탁으로 모여든다. 점심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면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아내가 식탁을 정리한다. 그리고 한 시간 전 나처럼 내 옆에 멍하니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좋다. 좋아. 를 연발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우리는 소파에서 티브이를 잠깐보다 스르륵 잠이 든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소리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나는 다시 아내를 흔들어 깨운다. 곧장 서재에서 카메라 가방을 챙겨 나와 아내의 손을 끌고 차에 오른다. 오늘은 어디를 가 볼까. 이곳저곳을 목적 없이 달려본다. 그러다 좋은 풍경과 마주치면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아내는 조수석에서 내리지도 않고 창문만 내린 채, 창 밖으로 발을 올려 두고는 핸드폰 삼매경이다. 여기 너무 멋지지. 풍경이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약간 흥분한 나의 말에 아내는 잠시 내가 보는 것을 잠깐 같이 보는가 싶더니. 구름이 너무 많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걸. 파란 하늘이 더 예쁠 것 같아. 잠깐의 감상평을 끝으로 다시 고개를 숙여 핸드폰으로 빠져든다. 아니야. 파란 하늘은 구름이 있을 때 더 파랗게 보여. 파란 하늘은 재미없는데, 거기에 구름들은 재미있단 말이지. 뭔가 대단한 말을 한 마냥 턱이 위로 슬쩍 올라간다. 집에 돌아가기 전 가장 석양이 멋지게 빛나는 익숙한 장소를 들른다. 빨갛게 물든 하늘을 보며 우리는 감탄을 연발한다. 아마 여기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다시는 못 볼 풍경이었을 거야. 내려오길 참 잘한 것 같아. 주문을 외우듯 우리의 선택이 옳았노라고 서로 주고받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이렇게 아무런 걱정 없이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판타지가 철없게도 아직 내 머릿속엔 남아있다. 돈은 누가 벌 것이며, 집은 무슨 돈으로 지을 것인지, 나는 앞으로 그럼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아무런 대책도 계획도 가져본 적이 없다.


교육공무원인 아내는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서 이동하면 되겠지만, 나는 회사를 관둬야 한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으로 집을 짓고 나면, 대출금을 갚아야 하겠지. 아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빠듯하게 살림을 하느라 다른 소비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반찬 값 아껴가며, 생활비 줄여가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아내는 원망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던 내가 나 스스로의 사업을 영위한다는 것이 어쩌면 더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하고 싶은 일은 사진 찍는 것, 그리고 글 쓰는 것이 전부인데 전부 돈이 되려면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다. 처음부터 인지도를 얻을 수도 없을뿐더러, 인지도를 얻는다고 해서 사업이 잘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닐 터.


사실 제주도를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판타지를 일일이 현실적인 문제를 따져가며 실현하려고 한다면 아주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은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단순하게 내가 스스로 '퇴사'라는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앞길이 캄캄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내의 저 말 한마디가 가져다주는 판타지가 너무 좋다. 행복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마치 내 눈앞에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의 제주도에서의 생활이 모두 내 머릿속에 있다. 아내는 저 말 한마디로 나를 뭉게구름이 피어있는 하늘에, 산을 등지고, 마당이 있는 그 어딘가의 제주도 우리 집으로 데려다 놓는다.


나는 걱정한 것과 다르게 복직한 이후 회사생활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항상 잊지 않고 동료들과도 최대한 배려하며 업무를 해 왔다. 그런데, 내가 회사생활에 적응하면 할수록 그곳의 경쟁 체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나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업무 인정이야 뭐 평이하게만 받으면 되지. 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게, 부서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더 중요해. 이런 업무들이 내 몸을 갉아먹게 놔둘 수는 없어. 난 스트레스받지 않을 거야. 이런 다짐들은 부서장의 평가에 무너져 내렸고, 주변에서 인정받는 동료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나도 인정받고 싶다는 갈망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런 내 욕망은 스트레스가 되어 되돌아왔다.


"아니! 나도 그 사람처럼 열심히 잘한 것 같은데, 나보단 그 사람을 더 인정하더라니깐!"


내가 이럴 때마다 아내는 그런 건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하지 않았느냐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내가 스스로 나에게 한계를 그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강박에 너무 사로잡혀 나를 너무 버려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때로는 화가 났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고 하면서도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내가 스트레스였고, 이러한 사실이 인지되면 또 내 몸이 좋지 않게 변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스트레스는 다시 스트레스를 불러왔다. 그리고 이런 의식의 악순환에 빠져 허우적대다 보면 점점 기운 잃고, 저 밑 어두운 감정의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아내는 그런 나를 발견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나에게 툭 한마디를 던져 놓았다.


여보, 우리 제주도 가서 살까?


그러면 나는 이내 제주도로 내려가 내 마음을 어지럽혔던 생각들을 모조리 그곳에 쏟아내고 돌아왔다. 나는 제주도에 없지만, 제주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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