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후군이 있었지,
한 동안 잊고 살았다.
항암 치료의 중반부쯤 들어서자 내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백혈구 수치가 정상으로 빠르게 회복되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4번째 항암은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하고 병원을 찾았지만, 결국 혈액검사 문턱을 넘지 못했다. 분명 힘들고 하기 싫고 미루고 싶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미루고 싶었던 치료인데, 막상 눈앞에서 퇴짜를 맞고 나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다음 주에 또 이 짓을 해야 돼?"
미룰 수만 있다면 미루고 싶은 마음이지만, 결국에는 주사를 맞기로 마음먹은 이 갈등과 마음고생을 또 해야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이왕 그래도 마음먹은 거 온 김에 주사를 맞고 가면 좋으련만. 이제 와서 아무리 다시 생각을 고쳐먹어 봐야 내 백혈구 수치는 이미 기준 아래인 걸.
내가 맞고 있는 항암주사가 가장 약하고 무난한 것이라고, 부작용도 별로 없을 거라고 의사 선생님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정말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태연하게, 힘들긴 하겠죠. 라며 슬쩍 웃어 보이셨다. 그 말에 딱 맞게 부작용에 다른 암환우들에 비해서 크지는 않았다. 머리카락도 머리를 밀어버려야 할 만큼 많이 빠지지도 않았고, 피부도 완전히 검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몸이 힘들어 하긴 하고 있었다. 점점 피부색이 돌아오는 속도도 느려졌고, 빠진 머리도 다시 빨리 채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구내염도 오래 지속되었다. 정말 몸이 지쳐가긴 하나 보구나. 그래도 이제 3번만 더 참으면 될 텐데.라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핸드폰의 블로그를 읽으려던 순간
우웅~
뭔가 눈 주변이 붕 뜬 기분이 들더니 이내 살짝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눈을 몇 번 끔뻑거리니 어지럼증은 사라졌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핸드폰이 아주 작아져 있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내 손도 미니어처처럼 아주 작아졌다. 작아진 걸까 멀어진 걸까. 멀리 있는지, 작아진 건지 모를 휴대전화 너머 풍경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멀어지거나 작아진 느낌은 별로 없다. 그대로인데? 다시 핸드폰을 보니 원래 크기대로 잘 보인다. 내 손도 그대로. 이상하네.
다시, 우웅~
살짝 다시 어지러운가 싶더니, 핸드폰이 아주 작아졌다. 손도 다시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 있다. 희한한 것은 그렇게 작아 보이는, 그렇게 멀어 보이는 휴대전화의 블로그 글이 아주 뚜렷하게 잘 보인다는 것이다. 이번엔 눈을 손에서부터 팔꿈치 그리고 어깨로 이동시켰다. 팔꿈치까지는 좀 멀어 보이는가 싶더니, 어깨에 시선이 다다르자 다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휴대폰도, 내 손도 모두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증후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앨리스가 커지고 작아짐에 따라 물체가 크고 작게 보인 것처럼, 어떤 물체가 실제보다 작아 보이거나 크게 보이는 등 형태적으로 왜곡되어 인식되는 질환이다. 측두엽의 문제에 의해 시각 정보가 왜곡되어 전해져 보이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나 실제로 뇌병변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나무위키-
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증후군을 갖고 있다. 사실 이 증후군 이름을 발견하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렸을 때 나는 굉장히 약하게 태어났다고 했다. 모유도 잘 먹지 못하고 토하기 일쑤였다고 어머니는 항상 어린 날 보며 안타까워했다. 분유도 먹여보았지만, 토해내는 것을 고치지는 못했다고 했다. 횟수만 조금 줄었을 뿐. 여기저기 인터넷도 없고 정보도 느리던 시절 어머니가 의존할 것은 주변 사람들의 조언과 사례들 뿐이었다. 어머니는 베지밀을 먹이면 좋다는 주변 친구분의 말을 듣고 베지밀을 먹여보기도 했다고 했다. 역시나 구토 증상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베지밀을 먹였던 게 가장 효과는 좋았어서, 베지밀을 먹고 컸다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어릴 적, 정확하게는 중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내 기억의 대부분은 구토와 코피로 채워져 있다. 밥을 잘 먹지 못했고, 잘 먹고 등교하는 길에도 이유 없이 구토를 했다. 차라는 차는 타기만 하면 무조건이었다. 명절에 좋지도 않은 비포장 시골길을 한 시간 반이 넘게 달려가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래도 정말 가끔은 멀미 정도에서만 그칠 때도 있어서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코피까지 더 자주 쏟자 어머니는 내 손을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두 눈이 똥그래져서 어머니를 다그치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니, 얘 가요. 지금. 영양실조예요. 영양실조."
"네?"
"얘, 영양실조라고요. 말이 됩니까? 어머니?"
나는 잘 먹지 못하고 구토를 했던 탓인지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잘 먹기만 하면 병도 아닐 텐데, 먹기만 하면 구역질을 해 대니 어머니는 마음 놓고 뭘 먹일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 말을 들은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덜컥 내려앉았을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지. 잘 먹고 잘 커도 걱정인 게 자식일 텐데. 잘 먹지도 못하고 코피를 쏟더니, 불우한 환경도 아닌데 영양실조까지 걸렸으니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아마도 이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종종 헛것을 보기 시작했다. 귀신을 보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고, 어떤 물체가 과장되어 보이는 증상이 시작되었다. 내 기억에는 거실에서 어머니가 먹으라고 갖다 놓은 귤이 좀 커 보인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첨엔 좀 큰가? 싶더니 이게 점점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너무 커져서 둥둥 떠다니다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그 이후로는 수박이 둥둥 떠다니기도 하는가 싶더니 엄지손가락이 퉁퉁 불어 커져 보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에는 이런 증상이 병이라거나 어떤 증후군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그저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고 버텼다. 얼마 동안 이 증상이 지속되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웠지만, 증상이 끝날 때쯤 느껴지는 어떤 감각이 있다. 그때까지는 눈을 꼭 감고 버텼다. 엄마 품에 안겨. 그냥 졸리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초등학교 고학년쯤 올라가면서부터는 증상이 약간 달라졌다. 과일이 커진다거나 둥둥 떠 다니는 헛것을 더 이상은 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눈에 보고 있는 사물의 크기가 왜곡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었고, 나도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는데 내가 피아노를 치려고 악보를 볼 때 자주 이 증상을 겪었다.
머리가 살짝 어지러운가 싶은 느낌을 겪고 나면 악보가 저 멀리 멀어져 갔다. 한없이 작아진 악보의 음표들과 기호들도 함께 저 멀리로 달아났지만 뚜렷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너무 무서워서 피아노를 치다 말고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어지럽다며 그날 레슨을 그만뒀다.
시간이 지나자 이 어지럼증과 왜곡에 적응이 되어갔다. 그리고 이 어지럼증을 풀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더 먼 주변을 보거나, 아니면 시선을 내 몸 쪽으로 점점 이동시키면서 스스로 왜곡을 왜곡이 아니라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증상이 금방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극복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조건을 몰랐다.
나는 어려서부터 비슷한 증상을 오래 겪었기 때문에 단순하게 내가 몸이 약해서 이런 증상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 이후에는 조금 건강해진 탓인지 점점 증상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간간히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고 주변 사물들과 크기를 비교해보고 내 몸과 크기를 비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증상은 사라졌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 이후에는 증상을 거의 겪지 않았다.
우웅~
그리고, 다시 증후군이 찾아왔다. 항암으로 지쳐있는 나에게 다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이 약해지기는 약해졌나 보구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금세 주변 사물들과 크기 비교를 해 가며 증상을 없애 놓았다. 그리고 오랜동안 잊고 살았던 이 느낌이 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증후군의 증상이 나와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이름도 멋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