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이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새번역)
이게 바로 찬송가 후렴의 고백이다. 영어 가사를 보면, 킹제임스버전 (KJV)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다.
But I know whom I have believed, and am persuaded that he is able to keep that which I have committed unto him against that day.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히고 온갖 고난을 받았지만, 그 와중에도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나는 후렴을 부를 때, ‘형편’이라는 단어 때문에 내 생각이 원문과는 꽤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나의 형편은 바울의 상황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됐다. 복음 때문에 어려워진 것도 아니고, 그저 나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이 부른 결과였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님께서 늘 돌보아 주신다는 막연한 믿음으로 위로받고 있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믿음에도 위로를 주시지만, 한글 가사만으로는 바울의 고백이 온전히 다가오지 않았다.
4절 가사도 마찬가지다.
한글 가사는 이렇게 말한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하지만 원문은 이렇다.
I know not what good or ill may be reserved for me
Of weary days or golden days, before His face I see.
“주님 얼굴을 뵙기 전, 내 앞에 어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지치는 날이 올지, 황금 같은 날이 올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후렴의 But과 함께 다시 고백이 이어진다.
그러나 나는 내가 믿는 분을 알고, 내가 맡긴 것을 그분이 그 날까지 지키실 것을 확신한다.
여기서 내가 맡긴 것은 영어로 "I have committed unto Him"이다. 바울이 맡긴 것은 분명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아마 영어 가사를 먼저 봤더라면 ‘형편’이라는 표현에서 내가 느꼈던 오해는 덜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무엇인지,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푯대를 향해 달려갈 때 어떤 어려움과 기쁨이 있을지 잠시 떠올려 본다. 그리고 이 경주를 끝까지 달릴 때까지 믿음을 붙들고 나아가기 위해, 언제든 이 찬송가의 후렴을 부를 수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https://www.youtube.com/watch?v=ZsFoFVRRYPk&list=RDZsFoFVRRYPk&index=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