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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Dec 05. 2022

슬픔이 더 이상 차오를 곳 없을 때

상실 그 이후의 삶

지난주 금요일, 교회 부부모임에서 받은 어떤 질문에 나는 "저는 요즘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것만 같아요"라고 하며 대뜸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사 후 분명 몸은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삶에 대한 모든 열정과 기쁨은 그 어딘가에 두고 온 듯했다. 주변은 요란하고 분주한데, 내 마음은 어딘가에 멈춰있는 듯 적막했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분명 내 속에 채울 만큼 채워놓은 슬픔이 터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우는 것뿐, 내가 왜 우는지, 얼마큼 울지, 언제까지 울지 그 무엇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눈물이 멈추고 나는 다시 바삐 움직였다. 이사 후 정리해야 할 것들에 온 정신을 쏟으며 금세 집안을 정리해냈다.


그리고 어제 주일 아침. 예배 전 혹시 모르니 휴지를 챙기라는 남편의 말에 "오늘은 울 일 없는데?"라면서도 챙겨간 휴지가 없었더라면 난감했을 정도로 눈물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유아세례를 받는 아기들의 모습. 목사님이 손에 물을 묻힐 때 물이 든 잔에 손을 넣으며 장난치는 아이를 보며 문득 나는 서글펐고 그리웠다.


"나도 아기가 있었는데"


아 이 마음에 나는 우는구나.


내게 이제는 없는 아이의 존재. 함께 지내려 기쁨으로 알아봤던 집에서 아기의 존재 없이 지내야 하는 시간들. 매일 꿈속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나의 소개를 하며 "저는 아이가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요"라고 말하며 울던 순간들.


떠나간 너를 위해서라도 꿋꿋이 일상을 살아내겠다는 엄마의 열심으로 묻어놓은 슬픔들이 너를 잃은 지 2달이 지나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충분히 슬퍼해도 괜찮다는 말, 좀 더 슬퍼해도 괜찮다는 말이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슬퍼하기엔 살아내야 할 일상이 너무나도 버젓이 있어서, 내 슬픔과는 상관없이 살아내야 하는 하루가 있어서 사실 '일부러' 외면하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외면되는 게 슬픔이란 감정인 듯하다.


그렇게 외면된 슬픔들은 일상 곳곳에서 조용히 신호를 보낸다. 몸을 무겁게 하기도 하고, 욕구를 저하시키기도 하고, 꿈으로 실현되어 보기도 하면서 슬픔은 삶의 구석구석에서 내게 자신을 알아달라 한다.


눈물이 방류되며 나는 그제야 내 아이를 잃은 슬픔을 체감한다. 너무도 빨리 닫아버린 수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감정들을 이제 다시 잠글 힘이 없다. 그저 빠져나갈 만큼 빠져나가라고. 힘이 쭉 빠진 채 우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설교를 마치며 목사님이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라고 옆사람에게 인사하라 하셨다. 남편이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라고 내게 인사를 건넸고, 내 손을 꼬옥 쥐며 한참을 우는 남편을 보며 이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슬픔은 분명 전염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성분이 늘 치명적인 것만은 아니다. 나의 슬픔에 동참해주는 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슬픔엔 형언할 수 없는 온기가 스민다. 참 이상한 슬픔.


예기된 상실이란 것을 세상을 살아가며 몇이나 경험할 수 있을까. 그저 무턱대고 치고 들어오는 상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슬퍼하다가도 일상을 살아가고, 살아가다가도 슬픔을 마주하는 반복뿐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슬픔을 함께 마주할 수 있는 '우리'가 있다면, 그것이 상실 가운데 주어지는 또 하나의 삶의 의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이렇게 울며 글을 쓰고 읽다가, 금세 밥을 차려먹고 청소를 하고 TV를 보며 웃을 나의 하루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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