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정이 양육의 주인노릇 하지 않도록

투사적동일시의 덫을 경계하자

by 새벽


최근 아기를 키우면서, '아이고 힘들어서 기절하겠네' 싶었을 때,
'나는 진짜 기절한 적이 있었던가?'를 떠올리니 어느 날의 일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수업 중 화장실이 급해서 갔다가 5~6학년 즈음 되는 덩치 큰 특수반 언니를 만났고 그 언니는 나를 벽으로 밀어붙이더니 이마를 세게 때렸다. 당시 코피가 잘나던 나는 바로 코피를 후드득 쏟기 시작했고 '살려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기절했던 기억이 났다.


다행히도 잠시 화장실에 왔던 다른 반 아이가 내가 당하는(?) 장면을 보고 다급히 선생님께 알려서 양호실로 보내졌던 것 같다. 양호실에서 눈을 떴을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 아기.. 얼마나 무서웠어" 하면서 안아주셨다. 그때 나는 눈물을 터뜨리며 '살았다.. 다행이다.. 따뜻하다..'라고 생각했고, 선생님의 위로로 씩씩하게 하교할 수 있었다.


문제는 집에 갔을 때 일어났다. 이미 학교에서 연락을 받았고 코피 때문에 옷에 피가 뒤범벅인 나를 보고 엄마는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뭐로 때렸을까. 기억은 없지만, 사정없이 맞으면서 들었던 말은 "어디서 이렇게 맞고 오래!! 이러고 누가 집에 들어오래? 다시 학교로 돌아가!!"라는 거였다. 너무 큰 충격이었다. 울다가 도망치고, 잡혀 또 맞고 울고, 뭐가 더 현실이었으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한번 더 기절하듯 잠에 든 것 같다.


조금 늦게 돌아온 언니는 나를 위로했지만, 내가 엄마한테 오히려 맞았다는 말을 듣자 멍하게 쳐다봤다. 언니라도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이미 언니도 엄마의 폭력에 질릴 대로 질려 있어서, 언니는 폭력 앞에 무기력했다. 우리는 그렇게 엄마가 두려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내 감정을 헤아리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속상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모르고, '쏟아붓는'방법만 알고 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아이가 어디서 맞고 쓰러졌던 것에 대하여 치밀어 오르는 속상함과 분노를 사랑이라 여기며 쏟아냈던 걸까? 온전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게 엄마의 부족하지만 최선인 사랑의 방식임을, 머리로는 안다.


왜 사랑이라는 행위가 내 감정과는 별개로 일어나고 있나


이 물음은 어느 정도 머리가 자라면서부터 생긴 물음이었다.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엄마가 사랑이라고 쏟아붓는 급진적 감정들은 내가 참 소화해 내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었다. 다행히도 엄마는 신앙의 힘으로 성찰하는 힘이 조금은 생겨서, 이전보다 월등히 나아진 모습이지만 여전히 엄마는 내가 한약 지어줄 돈으로 차라리 필라테스를 끊어달라 하면 그건 싫다 하고(이건 웃어넘길 일화다ㅎㅎ), 내가 유산의 사건을 겪었을 때도 그때 자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한다. 그만큼 작거나 큰 많은 문제에서 흐름이, 엄마의 감정을 중심으로 흘러감은 분명하다.



이런 상태를 <감정 중심적 양육>이라고 한다.


부모가 자신의 감정 상태에 따라 아이에게 제공하는 반응이나 양육 태도가 달라지는 현상이다. 부모의 감정이 '양육의 기준'이 되는 상태는 아이의 감정 표현을 위축시키고, 많은 혼란을 유발한다(Gottman, Katz, Hooven, 1996).


또한 부모 자신의 불안, 무력감, 분노와 같은 문제를 '아이의 문제'로 전가하고, 그 감정을 아이에게 쏟아붓고 통제하려는 모습은 정신역동이론에선 <투사적 동일시>의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런 엄마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내가 지금 아이의 감정을 헤아리며 사랑을 주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이게 온전히 지켜질 수는 없겠고, 내 아이는 언젠가 내게 "엄마 때문에 상처받았다" 하겠지만, 나는 그때에도 아이의 감정을 변명 없이 헤아려 주고 싶다. "그랬니. 미안하구나"라고... (앗 근데 벌써 쓰고 싶은 변명들이 생각나니 어쩌면 좋은가ㅎㅎ)


그럼에도 엄마의 모진 고생과 헌신 덕분에 나는 상담을 공부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뭐 대단한 곳까지 온 것 아니지만 나는 만족한다).


나는 엄마를 완전히 미워하지도 않고, 완전히 용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내 삶에 일어난 모든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럼에도 사랑받았고, 사랑했노라고 정리해가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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