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태어난 로디는 문화센터를 다녀본 적이 없다. 돌이 지나고 나서야 키즈카페에 처음 갔다.
첫 키즈카페는 2~3세 아이들에게 적합한, 아담하고 실속 있는 곳이었다. 어떻게 굴러도 다치지 않을 것 같은 안전함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첫 방문이었으니 신기해하며 로디가 무엇을 관심 있어 하는지 구경했다. 로디의 픽은 스프링카. 쪽쪽이 물면서 음악을 골라가며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오면 신나게 탔다. 특히 평일 오픈런이라 2시간 내내 전세 내듯 놀았다. 그래봤자 스프링카와 주방놀이에 할애한 시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리고 그 다음 주에 한 번 더 갔다. 이번에도 평일인지라 한 팀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도, 로디도 키즈카페에 천천히 적응해 나갔다.
그런데 로디의 두 번째 픽도 역시나 스프링카와 주방놀이. 나는 로디를 조금씩 유도했다. 여기서는 마음껏 뛰어도 된다고. 이 소리 나는 자동차를 타도 된다고. 봉봉을 즐겨 보자고!
나는 로디가 집에서 못하는 것들을 키즈카페에서 누리길 바랐다. 그런데 집에 없는 스프링카와 주방놀이에서 두 시간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그럴까.
답은 내가 키즈카페에 아이를 데리고 온 목적에 있었다. 키즈카페에 올 때는 내 마음에 여러 기대가 차 있다. 2시간동안 15,000원을 지불하고 얻어야 할 것은 '아이가 지쳐서 집에서 뛰지 않는 것', '저녁에 아이가 조금이라도 일찍 자는 것'이다.
키즈카페에 갔다 와도 집에서 신나게 뛰고 잠도 늦게 자길래 집에 미끄럼틀과 트램펄린, 주방놀이까지 구비했다. 제발 집에서 뛰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하지만 소용없었다. 부탁이 호통이 될 때까지 로디는 집에서만 그렇게 뛰어 다닌다.
집을 키즈카페와 비슷하게 꾸밀 수는 있지만 한계가 있다. 집을 카페처럼, 호텔처럼 꾸밀 수는 있어도 카페와 호텔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집에서 누릴 수는 없듯이 키즈카페는 그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친구들과 놀지 않더라도 그들의 웃음소리나 노는 모습을 배경으로 깔면 더 재밌게 놀 맛이 나나보다. 독서실이 아닌 카페에서 공부하는 게 더 잘 되는 이 엄마처럼.
키즈카페는 놀이터보다 다양하고 안전한 놀잇감을 제공하며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아이가 놀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같은 주방이라도 집보다 훨씬 훌륭하다. 한쪽에는 마트처럼 꾸며져 온갖 식자재가 놓여 있고, 건너편에는 셰프가 다룰법한 조리기구와 음식들이 있다. 집에는 바구니 하나에 식기와 음식이 다 섞여있는데.
키즈카페 주방에서 로디는 아주 바쁘다. 비록 다른 아이들이 갖고 노느라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지만 로디는 재료와 기구들을 하나씩 모아 자신이 찜한 자리에 가서 자신의 방식대로 세팅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건들면 아주 호되게 야단친다. 나는 모르지만 그 주방은 분명 로디만의 규칙대로 운영되고 있으리라. 1시간 반을 주방에만 있어도 로디는 즐거웠다.
중간 중간 "로디, 여기선 마음껏 뛸 수 있어. 집에서 못 뛴 거 여기서 다 뛰어!"라고 아무리 꼬셔도 넘어오지 않는다.
로디는 행복해했다.
깨달음.
엄마가 생각하는 가심비, 가성비와 별개로 아이의 즐거움을 존중해줘야 한다.
외식할 때 집밥 메뉴를 고르지 않는 것처럼, 그러니까 뷔페에서 비싸서 못 먹던 스시와 스테이크만 잔뜩 담는 것처럼 키즈카페에 투자한 시간과 돈을 아이의 뜀박질로 채우려는 마음은 이제 버려야 한다.
사랑하는 로디.
지난 번 키즈카페에서
너는 주방에서 잘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자꾸 이것저것 해보라고 해서 귀찮았지?
물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은 좋지만
너에게 새로움을 권하는 엄마의 마음이
마냥 너만을 위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
오늘 아침에도 어린이집에 가야 하는 로디가
애교스러운 몸짓으로 '키즈카페 가요?'라고 묻는 것을 보며
키즈카페 주방이 참 좋았나보다 싶어.
엄마가 종종 키즈카페에 데리고 갈게.
너가 뛰지 않아도, 자동차를 타지 않아도,
볼풀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줄타기를 하지 않아도,
몇 단계로 연결된 복잡한 미끄럼틀을 타지 않아도
엄마는 로디가 하자는 걸 같이 할게.
엄마를 찾으면 같이 놀고,
엄마를 안 찾으면 바라볼게.
조만간 또 신나게 주방놀이하러 가자꾸나,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