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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쪽지 Mar 17. 2020

퇴근하면 좋겠다,

퇴사하면 더 좋겠고


 간략하지 않은 말들일수록 줄이게 된다. 오히려 긴 하루를 담고 있는 날일 수록 그렇다. 말할수록 입이 아프다는 말이다. 온종일 떠드는데 입 좀 닫고 살고 싶다는 말이다. 하루 중에 딱 열두 시간을 보낸 곳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어쩌면 열두 시간 내내 바삐 움직여야 하는 게 내 몫이라도 된냥 머리도, 행동도 조금이라도 굼뜨지 못한다. 집에만 오면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이 된다. 일주일 내내 현관 도어락 건전지를 살 시간이 못되었다는 건 핑계임에 틀림없다. 쌓아둔 설거지 더미도 이를 잘 보여준다.


 참 이상한 게 사람이 그렇다. 지독히 철저하고 강압적인 공간에 놓이게 되면 머리가 백지장이 된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단 하나도 알 수가 없다. '나 원래 되게 서론, 본론, 결론이 분명한 사람이에요.'라고 한다면 그들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비웃을지도 모른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했는지를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를 말해야 한다. 말하면 본론이 길어지고, 말하지 않으면 서론이 길어진다. 방향 감각을 잃어 한 자리에서 두세 번 돌기도 한다. 방금 내가 본 사람이 안경을 꼈었는지, 젊은 사람이었는지, 웃고 있었는지, 표정이 굳었는지 알지 못한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 관심이 있었던 내가 이 곳에서만큼은 어떤 사람들이 지나갔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할 때가 많다. 내 표정도 숨긴 채 가지 않는 시간들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만든다.


오늘은 점심이 이십 분이나 늦었다. 이십 분 밥을 먹고 나니 다시 시작이다. 모두가 늦게 끝나서 오늘은 개인적으로 쉴 시간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치과는 점심 먹고 나서가 가장 바쁘다. 거의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에 밀려들어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수십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내린다. 저 멀리에서 바라보는 내 표정과 아무렇지 않게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겹쳐 답답한 공기가 나뒹군다.


 긴장을 풀어버리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긴장을 하게 되면 오작동이 나버리는 불편한 진실. 그럼에도 밥은 맛있었고 몇 시간 만에 마시는 물은 달았고 피곤함은 여전했다. 바라는 게 없어서 바랄 수 있는 게 없어서 괴로운가 보다. 기대할 게 없어서. 기댈 수가 없어서.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서.


그늘이 지고 천막이 처져 고개를 들어도 어둠이다. 어둠이 지나도 어둠이다. 아, 여기서 말한 어둠은 밤이 맞다.
아, 이제 퇴근.




- 2019년 10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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