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날은 길어지고 벚꽃은 잠시 피어서 금세 지워지고, 벌거벗은 나무들은 순식간에 나뭇잎으로 가득히 무성해졌다. 그 잎들은 서서히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 나보다 먼저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바깥 기온이 아닌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나무를 보며 느낀다. 가을이 끝나갈 때 순식간에 잎들이 떨어지더니 봄이 끝나가려고 하니 역시 순식간에 싹이 트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작은 테라스가 있는 원룸에서 남편과 살았었다. 테라스 앞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2층에 있는 집이어서 나뭇잎이 테라스에 살짝 걸쳐져 있었다. 테라스 문 앞에 작은 식탁이 있었는데,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나무를 바라보며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뭇잎 색깔이 변했네"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네" "나뭇잎이 다시 싹트고 있네" "벌써 나뭇잎이 풍성해졌네" "다시 여름이 왔네" 등등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집 앞에 있는 나무 한그루와 함께 느끼고 있었다.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했을 때는 저 나무의 잎이 다시 자라기 전에 우리가 어디에 있게 될지 고민한 적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귀국 후 집을 급히 구해야 했었다. 뜨거운 여름날 땀 흘리며 여기저기 남편과 집을 보러 다녔다. 몇 군데를 봤지만 딱히 맘에 드는 곳은 없었다. 서울에 있는 집들은 빼곡히 붙어있었고 당연히 테라스 있는 집은 우리 형편에 상상할 수도 없었다. 집을 빨리 구해야 했기에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조건만 맞으면 그중에서 하나 고를 작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부동산 아주머니가 '여기는 좀 비싼데' 하며 투룸 하나를 보여주었다. 비어있는 집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따뜻한 햇살이 우리에게로 비쳤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정면 창문으로 나뭇잎들이 보였다. 남편과 나는 그 집을 보자마자 좀 비싸지만 이 집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그 집은 우리의 한국 생활의 첫 집이 되었다.
지금 우리 집에서 보이는 나무는 독일 집에 있었던 나무와 비교하면 작고 잎도 풍성하지 않다. 그래도 그 나무를 보면 참 기특하다. 서울 한복판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 좁은 틈에 있는 나무 한그루가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또 나뭇잎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 주니 말이다. 작년 여름에 한국에 오고 첫겨울을 맞았을 때 창문 앞에 보이던 나뭇잎이 떨어지니 조금은 쓸쓸했다. 창문으로 다른 집들이 적나라하게 보이니 삭막한 도시생활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창문 앞에 있던 나뭇잎이 싹트는 것을 보았다. 남편과 나는 하루하루 커가는 나뭇잎을 보며 행복해했다. 지난 2주 동안 나뭇잎이 무럭무럭 자랐고 색깔은 더 짙어져 이제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아마 우리는 나무를 보며 또 이야기할 것이다.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