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레첼리나 May 05. 2024

밤의 산책

걷고 또 걷는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마음이 괴로울 때,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내가 하는 유일한 활동이다. 남편과 연애했을 때,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도 우리가 함께 가장 많이 하는 활동은 걷는 일이다. 산에 오르고, 숲 속을 걷고, 도시를 걸으며 구경하고, 휴일에는 동네 산책을 한다. 독일에서 우리가 살았던 도시는 10만 명 정도가 사는 작은 대학 도시였다. 집에서 30분 정도만 걸으면 시내에 갈 수 있었다. 시내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는데, 내가 다니던 회사도 시내, 남편이 다니던 학교도 시내, 성당과 교회도 시내, 쇼핑할 곳도 시내. 우리는 모든 볼 일을 걸어다니며 해결했었다. 집 근처에는 작은 산이 있었는데, 매주 주말마다 그곳을 등산하는 일이 우리의 주말 루틴이었다.


걸으면 나 자신과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산책하며 누군가와 같이 이야기하면 중간에 말이 끊겨도 어색하지 않고, 또 반대로 이야깃거리가 풍성해 지기도 한다. 남편과 산책하며 이야기 하고, 각자 생각에 빠지며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걷기도 하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혼자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살짝 걸음이 빨라지긴 하지만 걸으면서 나에게 집중한다. 이 때는 나 자신과 내 주위에 있는 익명의 사람들과의 대비가 더 뚜렷해진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생각하며 걷게 된다.


귀국 후 우리나라에서 산책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낀다.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춥고, 봄에는 미세먼지, 황사가 심하고 가을은 여전히 덥게 느껴진다. 그리고 특히 서울은 거리가 너무 소란스럽다. 자동차 경적 소리, 부모들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 건물 짓는 소리, 통화하는 소리. 내가 독일에서는 잊고 있었던 소리들이다. 더군다나 이제 거리에서 모국어가 들리니 산책하는 게 쉽지 않다. 독일에서는 내가 귀를 닫으면 독일어가 백색소음이 되어 버렸다.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독일어가 들리지 않으니 산책할 때는 나에게,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귀를 닫아도 모든 말들이 이해가 되니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산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산책을 포기할 수 없기에 밤에 산책을 한다. 우리나라는 밤에도 여전히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차분해지는 느낌이 든다. 요즘 같은 날씨에는 밤의 산책이 정말 좋다. 두껍게 옷을 입지 않아도 밤에 춥지 않은 온도이다. 밤에 부는 바람이, 살에 닿는 바람이 참 기분 좋은 바람이다. 밤에 듣는 거리의 소리들은 낮보다는 편하게 느껴진다. 서울 같은 대도시들은 밤이 아름답다. 낮에는 너무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가니 사람들이 날카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해가 지고 나면 모두들 마음의 긴장을 풀고 서로에게 힘들었던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며 즐겁게 밤을 보낸다. 밤의 산책이 참 좋다고 느끼는 때이다.






이전 02화 다시 나뭇잎이 나기 시작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