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직장인으로 살았을 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하루하루가 두려웠다. 내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아 불안했지만, 그 일상은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독일에서도 조용하고 작은 도시에 살았기에 나의 하루는 늘 고요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먹고, 남편과 전날의 뉴스를 유튜브로 시청했다. 15~20분짜리 짧은 뉴스는 아침 시간에 딱 맞는 루틴이었다. 뉴스를 다 보면 식탁을 정리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작은 도시였기에 대중교통을 타지 않고 걸어서 출근할 수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면 늘 하던 일을 했다. 프로젝트는 다양했지만 익숙해진 탓인지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 동료들과의 큰 마찰 없이 안정적인 직장 생활. 퇴근 후엔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쉬었다. 날이 긴 여름이면 남편과 함께 조깅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집에서는 요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인터넷에서 궁금한 것들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는 장을 보고, 등산을 하고, 성당에 갔다. 특별한 약속을 잡지 않고 남편과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내 일상에서의 특별한 변화는 휴가를 보낼 때뿐이었다.
그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나는 항상 불안했다. 한국 사람들은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고, 한국에서는 흥미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내가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고, 재미있고 역동적인 일들을 나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다. 독일 생활이 길어지면서는 독일의 단점들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왜 독일은 이럴까? 한국이라면 다를 텐데…" 이런 생각들이 쌓이자 사소한 독일 사람들의 말에도 기분이 상했고, 심지어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내가 독일에 있어 내 능력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는 것 같았고, 한국에 있었다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다. 한국을 방문한 뒤 다시 독일로 돌아올 때면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 썸머타임이 끝나고 긴 겨울이 시작되려 할 때면, 그 길고 어두운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남편에게 한국에서 일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고,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답을 줘야 했다. 처음엔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다. 한국에 돌아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남편과 이야기를 나눈 끝에 가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우리가 독일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제안을 수락하고, 한 달도 안 되어 오랜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한국에서의 일상은 완전히 달랐다. 이유 없이 바빴다. 특히 서울에 있다 보니 더 그랬다. 사람들은 발걸음이 빨랐고, 지하철은 늘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도로에서는 클락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런 삶이 낯설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마주하니 모든 게 새로웠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어려웠다. 관심사도, 생각하는 방식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으면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었을 텐데, 지금은 주로 들어주는 입장이 됐다.
달라진 나의 일상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독일에서의 평화롭고 고요했던 일상이 그리웠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던 그날의 선택이 옳았는지 스스로 묻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일상이 변했다면, 변한 일상에 맞는 규칙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지금 나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나중에 또다시 그리워할 것이라는 것을. 독일에서의 일상도 그 순간에는 소중히 여기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리운 것처럼 말이다. 적응이 안 되고, 낯설고, 혼란스러울지라도 지금의 시간 역시 나의 삶을 이루는 소중한 조각이다.
순간이 모여 일상이 되고, 일상이 모여 삶이 된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될 때는, 그저 지금의 일상을 온전히 느껴보자. 그 느낌만으로도 나는 이미 완벽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