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의 노스탤지어

by 브레첼리나

지난 일주일 동안, 아주 오랜만에 한국의 뜨거운 여름을 제대로 맛보았다.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맞이하는 세 번째 한국의 여름이다. 벌써 세 번째인데도, 여전히 한국의 여름은 낯설고 쉽게 적응되지 않는다. 아마도 햇빛은 뜨겁지만 건조한 유럽과 달리, 한국의 무덥고 습한 날씨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보니, 독일에서의 지난여름들이 문득 떠올랐고, 그리움도 커져갔다. 사실 여름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계절은 아니었다. 그런데 독일에 있으면서 여름은 어느새 가장 좋아하고 설레는 계절이 되었다. 길고 긴 어두운 겨울을 지나, 서머타임이 시작되면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해가 지는 독일의 여름은 정말 좋았다. 겨울이 한창일 때는 다가올 여름에 어디로 여행을 갈지 생각하고, 여기저기 찾아보고 계획을 세우며 그 시기를 버티곤 했다. 봄이 오면, 곧 휴가를 떠날 수 있다는 기대와 점점 길어지는 낮에 마음이 들뜨며 여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다 보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오곤 했다.


독일에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건, 거리 곳곳에서 젤라토를 먹으며 걷는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할 때다. 겨울에는 잘 보이지 않던 이탈리안 젤라토 가게들이 갑자기 많아진 듯한 묘한 기분이 들고, 나도 어느새 그중 한 가게 앞에 줄을 서게 된다. 평소엔 느릿느릿하던 독일 사람들도 젤라토 가게 앞에서는 누구보다 재빠르다. 원하는 사이즈, 종이컵인지 와플콘인지, 그리고 먹고 싶은 맛을 망설임 없이 말하고, 동전도 미리 손에 쥐고 준비한다. 주문을 받아 젤라토를 퍼주는 이탈리아 아저씨들은 어찌나 호탕했는지, 작은 사이즈를 주문하면 이렇게 더운 날 그걸로 되겠냐며 웃으며 되묻고, 농담도 곁들인다. 젤라토를 들고 친구와 나란히 걷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이제 여름이구나. 이번 여름에는 젤라토를 얼마나 많이 먹게 될까.’ 에어컨도 없는 이 독일의 여름, 나는 결국 젤라토 하나로 여름을 버텨내게 된다.


여름은 어느 나라든 축제와 행사가 많은 계절이지만, 독일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그렇다. 사계절 중 햇빛이 넉넉한 날이 여름뿐이니, 모두가 그 시간을 더 아끼고 즐긴다. 여름밤에는 각종 행사가 열리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연 야외극장이다. 공원 한복판에 큰 스크린이 설치되고, 준비된 의자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는다. 나도 맥주 한 병을 사서 풀내음 가득한 여름밤공기를 마시며 영화를 본다. 그러고 있으면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황홀한 기분이 든다. 영화가 재미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원한 바람, 밤공기, 손에 쥔 맥주,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여름밤은, 그 어떤 밤보다 로맨틱하다. 꼭 야외극장을 가지 않더라도, 독일의 여름밤은 늘 아름답다. 예를 들어 비어가르텐(Biergarten) 있는데, 식당 옆의 넓은 정원에 테이블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며 저마다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독특한 점은, 이곳에서는 음식을 직접 가져와서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보통 식당에서는 외부 음식 반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비어가르텐에서는 맥주만 주문하면 나머지는 자유다. 물론 식당에서 직접 요리한 메뉴도 주문할 수 있다. 친구들과 비어가르텐에 모일 땐, 각자 가져올 음식을 미리 정한다. 길게 뻗은 나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각자 싸 온 음식들을 펼쳐놓은 뒤 맥주를 주문한다. 그러면 어느새 이야기가 시작되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며 독일의 여름밤을 만끽하게 된다.


여름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여름휴가다. 독일 사람들 사이에는 “휴가 때문에 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름휴가는 1년 내내 준비하고 기다리는 가장 큰 이벤트다. 보통 2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여름휴가를 갖는다. 캠핑카를 몰고 알프스 근처에서 캠핑을 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지중해 연안의 나라로 떠나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며 휴양을 즐기기도 한다. 나와 남편은 해마다 번갈아 가며 산과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특히 남편 친구가 이탈리아에 있어서 자주 그곳을 찾았고, 그래서 내 여름휴가의 기억은 대부분 지중해 바다에 닿아 있다. 모래사장 위에 큰 수건을 깔고 누워 햇빛을 받다가, 땀이 나고 더워지면 바다로 뛰어들어 수영을 한다. 물속에서 한참을 떠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지치고, 조금씩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다시 모래사장으로 돌아와 수건 위에 몸을 눕히고, 햇빛에 젖은 몸을 말린다. 이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면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햇볕에 이미 바싹 마른 수영복 위에 입기 좋은 원피스 하나를 툭 걸치고, 근처 식당들을 둘러보다가 해산물 요리가 맛있어 보이는 곳에 들어간다. 와인 한 잔과 함께 맛있는 요리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밤이 찾아온다. 저녁이 되면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다들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얼굴이 하나같이 밝고 여유로워 보인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수다 소리, 아이 울음소리가 시끌벅적하게 섞여 흐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 여름휴가구나.’ 하고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작년 여름, 한국에서 동해 바다로 짧은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지중해 바다와는 달리 동해 바다는 파도가 세서 수영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근처 횟집에서 회와 매운탕을 먹고 있으니, 오래전 한국 여름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끄럽게 돌아가던 선풍기 소리, 풀숲에서 들리던 벌레 소리, 은은한 모기향 냄새, 시원한 수박과 달콤한 옥수수, 그것들이 내가 기억하는 한국의 여름이다. 교회 여름성경학교에서 갔던 수영장, 부모님의 지인 가족들과 함께 떠났던 서해 해수욕장, 살벌하게 놀았던 물놀이까지 모두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독일에 있을 때 가끔 한국의 여름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릿하고 아련해지곤 했다. 그건 아마도 어린 시절의 노스탤지어였을 것이다. 이제는 반대로, 독일에서의 여름을 떠올리면 그리움이 밀려오고 울컥한 마음이 된다. 그건 아마도 내 청춘의 노스탤지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유독 여름이라는 계절에는 노스탤지어가 강하게 밀려온다. 아마도 여름은 가장 많은 야외 활동과 특별한 순간들이 가득했던 계절이기에, 기억도, 감정도 더 깊이 남는 것 같다. 뜨거운 여름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 그건 어쩌면, 지난날의 향수에 잠시 젖어드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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