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다니던 대학교를 잠시 휴학한 후,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방황은 아니고,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에게 집중하면서 읽은 책이 한 권 있다. 당시 내가 좋아했던 노리플라이의 권순관 씨가 라디오에서 본인에게 감명을 준 책 한 권을 소개했는데, 그 책이 히사이시 조가 쓴 '감동을 만들 수 있습니까'였다. 히사이시 조는 지브리 팬이었던 나에게는 모를 수 없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였다. 라디오를 듣고 그 책을 바로 구매했다. 책의 내용은 히사이시 조의 음악과 예술에 대한 생각들을 담고 있었다. 책의 문장 하나하나가 나의 마음속에 깊게 다가왔다. 당시 사진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과 독일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터라, 더욱이 내가 과연 감동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인지 상상하며 책을 읽었다. 그 후로도 그 책은 독일에서 공부하다 지칠 때, 내가 지금 걷는 이 길이 나의 길이 맞는지 의심이 들 때, 항상 꺼내 읽곤 했다. 읽을 때마다 히사이시 조의 생각들은 나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나의 상황에 따라 그가 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책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 가장 많이 읽은 책, 나의 손때가 가장 많이 묻은 책이 되었다. 그리고 히사이시 조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히사이시 조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수많은 음악을 만들어낸 작곡가다. 지브리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미야자키 하야오가 생각나고, 미야자키 하야오를 떠올리면 또 자연스레 히사이시 조가 떠오른다. 그만큼 지브리의 영화와 그의 음악은 하나처럼 맞닿아 있다. 지브리의 OST만 들어도 바로 그 장면이 눈앞에 떠오를 만큼, 그의 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가장 아름답게 담아낸다. 그가 만든 음악 중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모두 소중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유난히 아끼는 곡은 마녀 배달부 키키의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다. 아마 마녀 배달부 키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브리 영화라서 일 것이다. 이 곡의 첫 음이 흘러나오면, 하늘을 나는 키키의 모습과 그녀가 바라보는 바닷가 마을 풍경이 스르르 떠오른다. 그 장면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해진다. 사실 이 영화는 전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모노노케 히메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처럼 심오하거나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음악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나를 울린다. 그렇다고 단지 슬픈 감정만 남기지도 않는다. 설렘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함께 안겨준다. 히사이시 조가 만들어낸, 어린 소녀의 간절한 꿈과 마음이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브리와의 작업 이외에도 히사이시 조는 수많은 영화 사운드트랙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는 아마 기쿠지로의 여름 OST인 ‘Summer’ 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여름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으며, 우연히 만난 한 소년과 함께 소년의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순수하고 엉뚱하지만, 따뜻한 정서로 가득하다. 히사이시 조의 ‘Summer’는 이 영화의 분위기를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한 곡이다. 여름의 공기, 순수하고 아이 같은 인물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모험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때로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슬픔까지—이 모든 것이 ‘Summer’라는 한 곡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곡은 말 그대로 인생이라는 사계절 중 ‘여름’을 위한 곡이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여름의 쨍한 햇빛, 푸르른 나무들, 그리고 흙길을 떠올린다. 인생에서 가장 모험으로 가득 찼던 계절, 나의 여름은 이 곡으로 기억된다.
히사이시 조는 원래 미니멀리즘을 탐구하던 현대 음악 예술가였다. 그런 그가 예술가의 길을 내려놓고 ‘거리의 음악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 첫 상업 음악 작업이 바로 지브리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 그가 작곡한 ‘바람의 전설’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히사이시 조의 최고의 곡 중 하나로 손꼽는다. 나 역시 이 곡을 들으면, 온몸으로 전율과 소름을 느낀다. 만약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를 단 하나의 곡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곡을 고를 것이다. ‘바람의 전설’은 깊은 절망과 슬픔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세상에 메시지를 던졌다면, 히사이시 조는 그 메시지를 음악이라는 감동으로 전해주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예술가로 여긴다. 사람들은 흔히 예술가를 엉뚱하고 자유롭고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게 본질은 아니라고 믿는다. 히사이시 조는 '감동을 만들 수 있습니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결국 꾸준히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프로라고 말이다. 아마 나도 예술의 길을 끝내 걷지 않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작품을 하나, 두 개 만드는 건 가능했지만, 꾸준히 만들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예술가의 태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 히사이시 조. 나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깊이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