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휴학하고 나서,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고등학생 때부터 마음 한편에 품고 있던, 내가 정말 좋아하던 ‘사진’을 이제는 본격적으로 공부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혼자 사진 공부를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어렵고 두꺼운 전공 서적도 읽었다. 그러다 우연히 사진 관련 매거진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독일 유학을 준비하며 독일어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늘 근처 커피빈에 들렀다. 거기서 그날 배운 독일어를 복습하고, 숙제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커피빈 한쪽에 비치된 잡지들 속에서 ‘월간 사진’이라는 매거진을 발견했다. '사진'이라는 이 두 글자가 반가운 마음에 자연스럽게 잡지를 펼쳤고, 그 순간부터 사진 매거진을 좋아하게 되었다. ‘월간 사진’은 사진을 공부하는 내게 아주 좋은 길잡이였다. 전공 서적이 사진의 역사와 이론을 알려준다면, 매거진은 지금 이 순간 사진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어떤 작가들이 어떤 주제로 작업을 하는지, 어떤 시선과 태도로 사진을 대하는지를 읽는 일은 나에게 배움이자 자극이었다. 그 후로 공부할 일이 있으면 일부러 커피빈에 갔다. 이미 읽은 매거진을 또 읽기도 했고, 새로운 달이 오면 새 매거진을 찾아 읽었다. 그 시간을 나는 참 좋아했다. 매거진을 넘기며 ‘나도 언젠가 이런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마치 나도 이미 사진작가가 된 것처럼 설레고, 기뻤다.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사진 공부를 시작했지만, 나는 곧 길을 잃었다. 학교 안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하루는 그냥 학교를 배회하다가 도서관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예술과 관련된 온갖 매거진이 있었다. 그날 이후 도서관은 나의 아지트이자, 조용한 작업실이 되었다. 주말을 제외하곤 거의 매일 그곳에 갔다. 도서관에는 예술 서적도 많았지만, 나는 특히 다양한 매거진을 즐겨 읽었다. 현대미술, 건축, 인테리어, 사진, 디자인, 그래픽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매거진을 펼치는 일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한 권씩만 읽어도 한 달이 훌쩍 지나갔고, 새로운 달이 오면 또 새로운 매거진이 책장에 꽂혔다. 갓 인쇄된 따끈따끈한 매거진을 가장 먼저 꺼내 읽는 사람은 늘 나였다. 이번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어떤 작가와 작업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 시간은 설렘 그 자체였다. 자연스레 ‘매거진’이라는 매체 그 자체에 관심이 생겼다. 글과 사진의 균형, 레이아웃, 종이의 질감과 두께, 쓰인 폰트까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마음이 끌렸다. 당시의 현대미술은 나에게 여전히 어렵게 느껴졌고, 솔직히 말해 흥미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디자인은 달랐다.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면서도, 예술의 창의성도 담고 있었다. 그게 내게는 매력적이었다. 점점 확신이 생겼다. 졸업 후 내가 가야 할 길은 디자인이 아닐까. 예술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일에 남아 정기적인 수입을 벌며 살아갈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이기도 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보던 매거진들 중 몇몇 잡지 회사가 내가 살던 뮌헨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무작정 ‘인턴으로 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급하게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잡지 회사들에 메일을 보냈다. 그중 두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하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그래픽 매거진 Novum, 다른 하나는 예술을 다루는 작은 독립 매거진이었다. 면접 보러 오라는 메일을 받았을 때,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저 도전한 나 자신이 대견했다. 먼저 Novum에 면접을 보러 갔다. 회사는 크진 않았지만 자유롭고 유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네 명 정도가 내 포트폴리오를 보며 질문을 했고, 나는 내가 준비한 이야기들을 최대한 독일어로 설명했다. 부족한 독일어였지만 연습한 만큼 말했고, 그 시간은 내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안 됐구나.” 그동안 열심히 만들었다고 생각한 포트폴리오였지만, 면접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다. 디자인 경험이 전무했던 나였기에 어쩌면 당연했지만, 괜히 부끄럽기도 했다. 결국 예상대로 탈락 메일을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예술 매거진을 만드는 부부의 집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그들은 사무실이 따로 없다고 했다. 대부분 외주를 통해 작업하기 때문에 집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제안했다. “너는 네 집에서 작업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와서 회의하면 어때?” 인턴이라 돈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디자인을 실제로 해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열심히 했다. 오래된 매거진의 레이아웃을 새롭게 디자인했고, 낡은 로고도 다시 만들었다. 여러 시안을 준비해 부부에게 보여드리고, 피드백을 받아 다시 만들고, 그렇게 결과물을 완성해 갔다. 그 일이 나는 참 좋았다. 처음으로 디자인이라는 일을 직접 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인턴이 끝난 후, 나는 밀라노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거기서도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늘 매거진을 읽었다. 이탈리아어는 몰랐지만, 매거진에는 사진과 그림이 많아서 내용을 이해하는 데엔 큰 문제가 없었다. 다양한 매거진을 접하면서, 나는 점점 확신이 생겼다. “그래, 나는 디자인을 해야겠다.” 독일로 돌아온 후 졸업을 마쳤고, 디자인 에이전시에 취직해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 매거진을 한 권씩 사 온다.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 매거진을 펼쳐 본다. 그러면 비로소 그 여행이 잘 마무리되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면, 의자 앞에 꽂혀 있는 잡지를 꺼내 본다. 가끔은 재미없을 때도 있지만, 새로운 매거진과 그 안의 사진들, 이야기들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언젠가 나만의 매거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다양한 매거진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정기 구독을 하는 건 아니지만, 종류도 스타일도 각기 다른 매거진들을 한 권씩 천천히 읽는다. 그 잡지들을 보며 상상한다. 나는 어떤 매거진을 만들까? 어떤 내용을 담을까? 레이아웃은 어떻게 할까? 이름은 뭐로 할까? 매거진은 어느새 나에게 단순히 작업의 영감이 아니라, 삶의 영감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나의 매거진이 세상에 나오게 될까? 그 질문은 이제 하나의 꿈이 되었고, 그 꿈은 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