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2. 다섯 달 논 년이 여섯 달 못 놀까

우리 부부는 이번 연말을 백수탈출을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남편의 취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인데, 요즘엔 내가 더 열을 올리고 있지 싶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이 비교적 명확한 남편 먼저 밥벌이 전선에 밀어 넣고자 애를 쓰고 있는 건데, 오히려 주객전도가 느껴질 정도. 사실 내가 나선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말이다. 왜 나는 내 갈 길 고민은 제쳐두고 남편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걸까.


솔직히 나는 회사 가기 싫다. 그냥 놀고먹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라 사회생활 자체가 힘들다는 거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나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에너지 소모가 심한 편이라 어느 조직에 있든지 금방 소진 돼버리고 말았다. 내가 직업을 자주 바꿔온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지난여름 회사를 그만두면서 결심했던 게 진지한 진로 고민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에게 맞는 걸 찾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제대로 된 방법을 몰랐다.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무얼 할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었을 텐데, 지금까지 그래왔다. 지독한 집순이인 것도 한몫했고.


초반엔 집에서 최대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애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늘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고, 그럴수록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 또한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특히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은 날 밀려오는 괜한 죄책감. 이게 요즘 가장 불편한 가시방석이 되고 있다.


오늘로 두문불출 9일째. 이대론 안 되겠다 싶다. 슬슬 집밖으로 나가야겠다. 기왕이면 규칙적인 시간에, 몸을 좀 움직이면서, 생산적인 걸 할 수 있는 그런 외출. 그동안 좋아하고 즐겁게 했던 일을 떠올려 봤는데, 나는 최대한 생각을 줄이고 단순 반복적인 노동을 할 때 가장 큰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알바를 좀 해볼까 한다. 늘 가졌던 부담감은 되도록 적게 안고 새로운 것들에 노출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보고 싶다.


사실 며칠 전 교보문고에서 도서진열 알바를 구하길래 이력서를 넣어봤는데, 아예 이력서를 열어보지도 않고 마감이 돼서 좀 풀이 죽고 빈정상했더랬다. 아무리 원하는 연령대가 아니라도 지원 메일 정도는 다 열어보는 게 기본 예의 아닐까. 그동안 호감만 있었던 교보문고에 세모눈을 떴던 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불현듯 박원숙 배우가 예전에 냈던 책 제목이 떠오른다. '열흘 운 년이 보름은 못 울어'. 그래, 다섯 달 논 년이 여섯 달 못 놀까. 여유를 갖고 좀 더 괜찮은 알바를 찾아봐야겠다. 뭐든 시작하고 움직여야 올 것이 올 테니까.


"여보, 나 먼저 출근할 수도 있어, 긴장하라구! 일단 여기부터 시작해 볼게. 천천히 가더라도 이해해 줄 거지?"


"긴장해서 그런지 내가 먼저 출근하게 됐네? 당신은 천천히 와."



keyword
이전 21화#21. 뭐, 내 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