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3. 무대책 중년 백수 부부, 이만 물러갑니다

삼수 끝에 브런치 작가가 되면서 가장 먼저 쓰고 싶은 것은 백수가 된 우리 부부의 이야기였다. 지난 여름 대책도 없이 둘 다 사직서를 내버리고 난 후의 일상을 기록해보고 싶었다.


솔직히 처음엔 근사한 전개가 될거라 생각했다.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며 그간의 피로를 씻어내는 두 사람, 다양한 경험과 성찰을 통해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는 두 사람, 서로의 고민을 심도 있게 나눠주며 응원하는 두 사람, 마침내 운명의 진로를 찾아내 인생 후반전의 문을 멋지게 열어재끼는 두 사람의 뒷모습으로 해피엔딩.


하지만, 그간의 기록을 보아 알겠지만 현실은 지지리 궁상이었다. 여름엔 해맑게 놀았고, 가을엔 슬슬 불안했으며, 겨울엔 바짝바짝 애가 탔다. 말라가는 통장잔고도 신경이 쓰였지만, 무소속의 불안감 앞에서는 마냥 태연하기 힘들었다. 특히 오래 쉬어본 적 없는 남편의 괴로움은 갈수록 커졌다. 역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건 웬만큼 단단히 마음 먹지 않고선 어려운 일이었다. 출구는 많고 입구는 가도가도 나오지 않는, 중년의 평범한 직장인에게 새로운 길을 찾는 건 그런 거였다.


어찌됐든 둘 중 한 명이라도 새 길에 들어서면 이 스토리를 마감하려고 마음 먹었었는데,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남편은 다음주부터 출근한다. 정말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제안이 들어왔고, 감사히 수락했다. 사기업 근무 경력이 많지 않은 남편에게 분명 새롭고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아직 정해진 건 없다. 마음이 가는 일부터 조금씩 몸으로 부딪혀보기로 했고, 이력서도 넣는 중이다. 처음부터 더딘 결말을 예상했었기에 조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름부터 겨울초입까지 우리 부부는 늘 함께였다. 남편이 대학원 수업을 가는 일주일 이틀을 제외하곤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하루 24시간을 같이 했다. 신기하게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 여름에는 남편이 꿈꿨던 '홋카이도 펜타곤 정복 여행'도 열흘간 다녀왔다. 우리는 짧게나마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었는데, 이전 그 어떤 여행보다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지난 6개월은 우리 부부에게 다시 못 보낼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처음 기대했던 근사한 결말은 아니지만 일단 이렇게 일단락한다. 그동안 뭘 좋아하고 뭘 해야 마음이 편한지 솎아내는 건 해놨으니 앞으로 길게 보고 부지런히 가보련다. 뭔가 정말 새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이 나이에 기대감으로 설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이 또한 새롭다. 다시 시작이다.

keyword
이전 22화#22. 다섯 달 논 년이 여섯 달 못 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