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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여보, 숨고르고 빌드 업!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던 주말을 보내고 나니 12월. 아니나 다를까 제법 겨울 같은 날씨가 찾아들었다. 잔뜩 옹송그리며 아침 일찍 남편과 집 앞 카페에 들렀다.


지난 금요일 남편의 입사 서류전형 결과가 발표된 후 둘이서 제대로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었다. 나는 주말 내내 친정에 머물며 김장을 했고, 남편은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터였다. 상심이 클 걸 아니 뭐라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남편이 커피 타임을 제안했다.


예상했던 대로 남편은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남편의 깔끔한 결정력을 참 좋아하고 높이 사는데, 오늘 남편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후회를 이야기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군가 강력하게 조언해 줬으면 좋겠다는 속마음까지. 평소 남편답지 않은 생각들로 주말 내내 고민했겠구나 싶어서 안쓰러웠다.


알레르기 핑계를 대며 흥흥 코를 푸는 남편의 등을 몇 번 토닥거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었다. 늘 장난스런 대화법에 익숙한 우리에게 진지함은 낯설고, 마무리는 어색하다.


대학원 수업 때문에 서울 가야 하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읽으려고 챙겨 온 책을 펼쳤다. 오래전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작가의 책이었다. 넘치는 감각으로 한 시대 문학계를 평정했던 젊은 작가는 이제 삶의 씨줄 날줄을 고르며 인생의 의미를 단언하는 중년이 되어 있었다. 내 남편과 동년배인 그는 책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침을 상기시켰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걸 했으면 좋겠다. 이건 나 자신에게도 바라는 바다. 둘 중 누구든 시작하면 나머지 하나도 금방 출발할 수 있을 거다. 좋아하는 걸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는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좋아하는 게 명확한 남편이 한 발 앞서 해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편이 이야기하는 '강력한 조언'을 해줄 누군가가 얼른 나타나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젠가 남편의 선택에 반기를 들었다가 크게 서운해하는 모습을 본 뒤부터 나는 그저 그의 선택을 끝까지 지지해 주는 최후의 아군으로 활약 중이다. 가끔 뜨거운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지만, 그럴수록 입을 더 꾹 닫고 그 선택이 옳은 결과를 가져오길 한 번 더 기도한다.


새해가 오기 전, 우리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새로운 길목에서 신발끈을 묶고 힘차게 달릴 준비를 마칠 것이다.


"남편! 아까 얘기한 거 잊지 않았지? 숨고르고 빌드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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