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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새로고침 무한반복자의 심리기록일지

10:15 AM

아침부터 컴퓨터 앞에 앉아 연신 F5 키를 누르고 있다. 콘서트 티켓 예매처럼 빠른 속도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조마조마한 마음 때문에 자꾸만 새로고침을 하게 된다. 사실,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탓도 있다.


오늘은 남편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회사의 서류전형 합격자 발표일이다. 마침 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던 남편은 "결과 나오면 바로 알려달라"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졸지에 내가 결과를 전해줘야 하는 상황. 그게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정말 난처한 임무다.


12:03 PM

거 참,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해서 오전에 공지 좀 올려주지. 점심시간이 되었으므로 일단 오후까지 긴 기다림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종 합격자 발표도 아닌데 왜 서류 단계에서부터 이렇게 긴장이 될까. 남편이 워낙 간절한 것도 있고, 아무래도 회장님 낙하산 소식 때문에 부쩍 더 신경이 쓰이는 것 같다. 우리 남편, 자타 누가 봐도 그 자리에 딱인데. 회사는 유력한 경쟁자인 남편을 아예 서류에서부터 떨궈낼 것인가, 면접까지 올려주는 아량을 베풀 것인가.


이 순간,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떠오르는 건 정말 어쩔 수가 없네.


2:26 PM

남편은 요 근래 계속 앓았다. 심리상태가 곧장 몸으로 나타나는 사람이다. 조금 다투거나 내가 모진 소리를 한 날이면 대번에 몸살로 눕는 사람이니, 요즘 속이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 걱정이 크다. 항상 잔잔해 보이지만 나보다 더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중.


남편과 나는 종교가 다른데, 믿는 분의 이름은 같아서 함께 기도한다. 처음엔 그 자리에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했지만, 언제부턴가 더 이상 구복(求福)하지 않기로 했다. 원하시는 대로, 쓰시고자 하는 곳으로 이끄시되, 기쁘게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3:12 PM

퇴근 무렵에나 올려주려나. 나도 김장 준비 도우러 4시엔 나가봐야 하는데. 남편은 지금쯤 세미나 자리에서 토론 중일 것이다. 정신이 온통 이 결과에 쏠려 있어서 잘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행사가 끝나고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3:25 PM

결과 발표. 불합격.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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