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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Aug 16. 2020

내 방에 고양이가 있다니

서로 내외하던 첫째 날

처음 들렀던 동물병원에서 안심할 수 있는 진료를 못 받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동물병원에도 가볼 참이었다. 하지만 다른 병원을 찾아가기에는 애매하게 늦은 시간이라서 일단 내 방에서 하루 재우고 다음 날 데려가기로 했다. 다음 병원에는 ‘관리받고 있는 고양이’처럼 보이도록 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막 주워온 고양이로 보인 것이 진료를 제대로 못 받은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서였다. 고양이에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몇 가지 더 사고 집에 가는 길에, 분식집 앞을 지나면서 그제야 저녁을 안 먹었다는 게 생각났을 만큼 정신없는 하루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기 고양이가 잠을 잘 공간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겨울이 끝나면서 서랍 깊은 곳에 넣어뒀던 전기방석을 꺼내고 그 위에 천으로 된 숨숨집을 올렸다. 전기방석의 미지근한 온도가 아기한테는 혹시 너무 뜨거울까봐 숨숨집 안에 담요와 작은 방석도 하나 넣어뒀다. 아기 고양이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 놓고 나서 나는 오늘의 가장 중요한 과업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 지옥의 냄새가 폴폴 나는 아기 고양이를 씻길 준비.

미지근한 물과 고양이 샴푸, 그리고 내 방에서 제일 흡수가 잘 될 것 같은 수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주인공을 데리러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아기 고양이는 가방 안에 조용히 있었다. 자는 줄 알았는데 가방을 열어보니 눈은 뜨고 있었다. 너 이제 씻어야 돼. 가방에서 꺼내 드는데도 움찔도 하지 않는 고양이를 보니 마음이 좀 짠했지만, 그 짠함을 이기는 냄새가 났다. 만춘이가 자리를 잠깐 비운 동안 얘가 어디 시궁창에 빠졌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고양이도 태어나서 목욕은 처음이었겠지만, 나도 고양이 목욕은 처음이었다. 어려운 수술의 집도를 앞둔 의사만큼 비장한 얼굴로 고양이를 안아 들고 화장실로 갔다.

고양이 다리 정도 올라오게 받아놓은 따뜻한 물은 목욕을 시작하자 금방 구정물로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고양이도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하찮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하찮다고 센 척하지만, 그때는 고양이가 다리만 한 번 허우적거려도 혼비백산이었다. 제발 10초만! 10초 만에 끝낼게!! 라며 지키지 못할 약속을 10번 정도 한 다음에야 우리의 첫 목욕은 끝이 났다. 이제 힘든 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복병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기운 없는 아기 고양이를 쫄딱 젖은 채로 둘 수는 없는 일. 수건으로 감싸서 아주 약하게 드라이어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30초는 버텨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꿈이 야무졌다. 드라이어 소리가 들리는 순간 고양이는 수건에서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수건에서 빠져나간 고양이는 슬금슬금 에코백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너 거기 들어가면 목욕부터 다시 시작이야... 다행히 가방에 들어가기 직전에 겨우 다시 잡아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고양이도 나도 너덜너덜해졌을 무렵에 물기가 어느 정도 말랐다. 이제 괜찮을 것 같아서 따뜻한 숨숨집에 넣어줬더니, 회식 끝나고 돌아오신 아빠처럼 담요 위에 척 쓰러졌다. 첫 목욕이 어지간히 고단했던 모양이다.

숨을 쉬는 지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을 정도로 오래, 깊게 잤다.

적당히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숨숨집 안에서 고양이는 한참을 잤다. 길에서는 깊은 잠을 못자 버릇해서 이렇게 잘 자나 싶어서 좀 짠했다. 짠한 것도 잠시, 얘가 혹시 죽은 건 아닌가 싶어서 몇 번이나 나는 고양이의 작은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확인했다. 고양이가 자는 동안에도 나는 바빴다. 사료를 불리고, 화장실 대용으로 쓸 작은 플라스틱 상자에 모래를 채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고, 그제야 나도 씻고 잘 준비를 시작했다. 나 혼자 파닥거리며 분주한 동안 고양이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잘 자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고양이 깨어나는 건 보고 자야겠다 싶어서 나는 조금 더 깨어있기로 했다. 동물병원에 가서 뭘 물어봐야 할지 내용을 정리하면서 30초에 한 번씩 숨숨집을 흘끔거렸다. 한 번 깨우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 한참 동안 미동도 없던 숨숨집이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낮은 벽을 넘는 데 1시간 가까이 걸렸다.

드디어 깨어난 고양이가 밖에 나와서 사료를 먹을 줄 알았다. 손으로 들었을 때 갈비뼈가 만져질 정도로 마른 친구라서 밥 냄새를 맡으면 배가 고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나올 듯 말 듯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꺼내 줘야 하나 싶었지만, 아직 서로 내외하는 사이기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 속도로 나와야 할 것 같아서 우선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집에 온 지 5시간 만에 드디어 밥을 먹는 아기 고양이

낮은 벽 앞에서 우물쭈물한 지 한 시간쯤 지나 드디어 한 걸음 나온 고양이는 밥을 발견했다. 냄새를 킁킁 맡고 조금 먹는가 싶더니 나를 보고는 다시 숨숨집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나만큼 고양이도 낯을 가리는 느낌이었다. 고양이는 밥을 먹어야 하고, 나는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 수면등을 약하게 하나 켜놓고 일단 자기로 했다. 내가 자려고 누웠더니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서 궁금했지만 애써 안 들리는 척하고 누워있었다. 조금 있으니 물을 챱챱 마시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내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내 방에 고양이가 있다니. 너무나 긴 하루를 보내서 녹초가 되었는데도 걱정과 설렘으로 잠이 안 오는 이상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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