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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명 Aug 19. 2020

일주일,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

옷장 밑에서 침대 진출까지

처음 이틀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사는 곳이 갑자기 확 달라진 여명이는 나보다 더 그랬을 거다. 여명이와 나에게는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옷장 밑 책장 밑, 주로 좁고 어두운 곳에 숨는 것을 좋아하는 여명이 때문에 나는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구석구석 청소를 해야 했다. 엄마가 그것 참 고소하다고 했다.

다른 어떤 곳보다 눈이 아파 보이는 여명이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안약 넣기였다. 동물병원 선생님은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나누어서 하루에 네 번 넣어주는 게 좋다고 하셨고, 융통성 없는 나는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했다. 출근을 하는 평일이 문제였다. 다행히 회사와 집이 도보 20분 정도 거리라서 나는 일주일 동안 점심시간마다 집에 들렀다. 어딘가 가구 밑에 숨어있는 여명이를 찾아서 눈에 안약을 넣어주고, 10분 정도 손에 얹어서 토닥토닥해주면 점심시간이 빠듯하게 끝났다. 경사진 길을 오르내리면서 왜 하필 여름에 여명이를 만났을까를 한탄했다.

항상 가구 밑에서 숨죽이고 있느라 내 속을 뒤집어 놓던 여명이는 내가 없을 때만 집안 여기저기를 탐색하는 모양이었다.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면 사료와 물이 줄어있었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 준 화장실이 내 화장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거운 모래를 이고 지고 와서 만들어줬는데 왜 쓰질 못하니...덕분에 나는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여명이가 여기저기 숨겨놓은 대소변을 찾아야 했다. 뜻밖의 보물찾기에, 집에 돌아올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오늘은 또 얼마나 참신한 곳에 숨겨놔서 나를 전율하게 만들까. 대변은 쉬웠다. 어딘가에 숨겨놓은 걸 찾아서 화장실에 두고 여명이한테 보여줬더니 다음부터 기가 막히게 화장실을 잘 사용했다.

문제는 오줌이었다. 오줌 냄새를 화장실에 묻혀 놓으면 된다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여명이의 화장실에서는 맛동산만 찾아볼 수 있었고, 감자는 캘 수 없었다. 여명이는 현관을 자주 화장실로 썼다. 현관 바닥에서 오줌을 발견하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 운동화를 신으려고 발을 넣었더니 여명이 오줌으로 흥건해서 기겁한 적도 있었다. 세탁해도 냄새가 빠지지 않아 결국 그 운동화는 요절했다. 아직 침대까지는 점프를 못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가도, 뜻밖의 장소에서 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울고 싶었다. 만춘이를 만나면 양육비를 받겠다며 펄펄 뛰었던 것도 이무렵의 일이었다.

끝이 안 날 것 같던 오줌 테러의 종지부를 찍어준 사람은 동생이었다. 어느 날 여명이를 보러 놀러 온 동생은 여명이가 슬금슬금 신발장으로 가는 걸 봤다. 그리고 내 신발 위에 자리를 잡는 걸보고 번개같이 낚아채서 화장실에 자리를 잡아줬다. 처음에는 거기서 이탈하려고 하던 여명이는 급했는지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고 한다. 한 번으로는 확신을 할 수 없었던 동생은 두 번째로 여명이가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나에게 알렸다. 진심으로 동생을 업고 동네를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여명이는 화장실을 완벽하게 가렸고, 가구 밑에서 나와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내가 바닥에 앉아있으면 슬쩍 다리에 올라오기도 했고, 내가 누워있으면 슬쩍 팔에 머리를 올리기도 했다. 폭신한 숨숨집과 쿠션을 버려두고 맨날 가구 아래의 차가운 바닥에서 자는 게 짠했는데, 이제는 숨숨집에 들어가서 자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같이 사는 환경에 익숙해져 갔다.

임보 누나 팔도 베고, 손도 자근자근 밟고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적응은 여명이 혼자 한 것도 같다. 일주일 동안 천천히 나와 내 공간에 마음을 열어준 여명이한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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