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원사계 Dec 14. 2023

조카를 사랑하는 이유

딸기맛 숨소리

'안녕, 나는 네 이모야.'


한파가 내려앉은 어느 겨울날 아주 큰 고구마 같은 아기가 태어났다. 보름이라는 태명의 핏덩어리다. 아직 정식적인 이름은 없다. 생명의 씨앗을 처음 보았던 날 보름달이 크고 휘황찬란해서 언니가 지어준 태명이었다. 엄마가 '보름아~'라고 하니 살짝 움직이며 기척을 보인다. 외할머니의 음성을 알아 차린 것일까? 우연의 일치일까. 세상에 이렇게 작고 작은 인간이 있다니.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말 그대로 갓 태어난 아기 인간이었다. 어딘지 에일리언 같기도 하고, 눈코입이 달려 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닮지 않은 것 같고. 신생아실에 누워 있는 걸 보니 다른 아이들과 이름표가 바뀌어도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언니는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을 느끼며 보름이를 낳았다. 무통주사라는 것이 운이 좋아야 효력을 발휘한다는 건 언니의 출산을 옆에서 보며 알게 된 사실이다. 덜 아플 수 있는 것 또한 운빨이라니. 입시, 취업, 각종 고시들에 이어 출산마저 운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다소 지독하다고 여겨졌다. 보름이는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아기들 중에서도 가장 작았다. 눈에 띄게 작은 신생아를 보고 있으니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눈물이 났다. 신생아실 앞의 유리창에서 엄마와 함께 보름이를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기억이 난다. 주변 사람들은 아마 우리에게 엄청난 사연 같은 것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모세의 기적처럼 우리 모녀를 피해 주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우리들에겐 슬픈 사연 같은 건 딱히 없었다. 모녀가 심하게 F일 뿐이었다.


언니는 출산의 후유증이 아주 심했다. 아이를 낳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산모도 더러 있었는데 언니는 휠체어에서 초주검이 되어 병실로 들어왔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까지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걱정을 하며 언니를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산모들 중에 언니가 가장 위독해 보였다. 아이를 낳다 죽는 사람도 있다던데 그게 언니는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잠시 뒤 침대에 누워서 들어오는 산모를 보며 그래도 언니는 양반이었구나 하는 안도를 했다. 보름이가 태어날 그날 밤 우리 가족의 밤은 너무나도 길었다. 언니가 보름이를 보고 처음 한 말은 이거였다.


'밤톨 같아.'


밤톨이라는 귀여운 단어를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세상 슬프게 말하는 언니였다. 열 달을 품고 있던 아이를 처음 품에 안게 되었을 때의 마음은 어떨까? 겪어보지 못한 일이니 감히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아마 요동치는 감정을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갓난아기들은 먹고 자기만 한다더니 진짜였다. 자는 시간 외에는 먹었고 먹은 뒤에는 다시 잠만 잤다. 조막만 한 애를 보며 생각했다. 대체 언제 걷고 말하고 사람이 되는 거지? 내 눈엔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 작았다. 요정 혹은 아기천사가 아닐까 싶었다. 만졌다가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아서 감히 만질 수도 없었다. 무균실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생명을 세균 덩어리인 내가 안아봐도 괜찮을까? 내가 바깥에서 묻혀온 병균이 보름이에게 닿을까 겁이 났다. 그런 보름이를 처음 안아본 날이 생각난다. 내내 잠만 자고 있었는데 꼬물거리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 감정을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아마도 사랑이지 않을까 싶다.


태어나고 몇 달이 흐르니 제법 사람의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신기했다. 주는 대로 조금씩 받아먹기도 하고 참새처럼 입을 벌리는 모양이 아기새가 따로 없었다. 보름이는 특히나 딸기를 정말 좋아한다. 아주 애기 때부터 딸기를 잘 먹었다. 딸기를 먹다 잠에 들면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딸기 냄새가 났다. 그 애가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은 그때였다. 귀여운 애가 귀여운 냄새를 풍기는 찰나. 보름이의 입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면서 장난을 치면 엄마에게 등짝을 맞기도 했다. 10살이 된 지금도 딸기귀신이다. 딸기철이 되면 딸기 농장에 직접 찾아가 가장 향이 진하고 빨간 딸기를 한소쿠리씩 사 와서 먹인다. 딸기를 먹고 딸기냄새를 풍기며 이모에게 쉬지 않고 조잘거린다. 너는 아직 1살 때랑 다른 게 없구나.



작가의 이전글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