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종종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wad May 09. 2020

비 오는 날도 좋습니다

2020.05.09.





















1

어떤 꿈도 꾸지 않은 날에는 괜찮은 기분으로 일어난다. 불면 없는 밤이 축복이란 걸 알게 됐다. 수면제을 먹지 않고 버티고 있다. 무엇에든 의존하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크다. 기회가 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생각보다 어렵고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렵게 낸 용기들을 외면하는 서글픈 짓은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2

어제저녁부터 내린 비와 자욱한 안개가 바깥세상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아파트 단지만 어렴풋이 보였다. 날이 우중충하지만 마음은 괜찮았다. 물을 데워 선물 받은 차를 한 잔 마셨다. 몸을 데우면서 오늘 할 일을 적었다. 할 일을 이렇게 적어 보는 날에는 왠지 활력이 생긴다.


3

아침의 그런 마음에 배신당하는, 불과 점심.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저녁까지도 배신은 꿋꿋하다. 날이 우중충하니까 마음이 안 괜찮은 게 아닐까, 라는 물음에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모호한 바깥과 모호한 마음. 아침부터 밤까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쓸려만 간다. 몇 년 전 썼던 일기와 소설들을 읽다가 눈물이 난다. 


4

과거의 글과 과거의 사진에 잠식당한다. 망할 놈의 기억.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다고 사는 게 쉬운 사람이 말했다. 인생이 쉽다던 사람이었다. 뭐가 그렇게 다 쉬울까. 나는 사랑하는 것도 잊는 것도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죄다 어렵기만 한데. 사실 그 쉬운 사람은 몇십 년간 우울하다가 그런 무거운 생각은 버리기로 결심한 후 바로 나를 만났었다. 나는 희생양.


5

몸이라도 움직여 봐. 오늘은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래도 해봐. 너를 붙잡고 한탄한 게 미안해서라도 나는 겨우 빠져나와 요가 매트를 깔았다. 한 시간 동안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명상에는 잡념이 필수 요소인가. 팔다리가 저렸지만 통증이 지나가길 견뎠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통증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에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후천적 체력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