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건강한 변화
올해 마지막 요가를 끝내고 사바아사나 자세에서 오래 누워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잡념으로 머리는 복잡했고, 그러다 어서 지나가버린 올해를 기록하고 싶어졌다. 외출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마스크를 끼면, 정신이 같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한 해다. 하지만 그렇게 멍하니 손 틈 사이로 사라져 간 듯한 365일이 그 어느 때보다 귀했다. 잔인하고 힘든 한 해였어도 내게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성장이 있었기에.
이 브런치를 시작하며 적어두었던 잡다한 날들이 지금 쓰는 이야기로 정리되는 것 같다.
미니멀리즘에 가까워졌다. 필요 없는 물건을 많이 버렸다. 전자기기나 쓰지 않던 새 물건들은 중고 거래를 했다. 사진과 편지도 상당히 비워냈다. 이제 보지 않는 사람들의 사진을 미련 없이 지웠다. 물질적인 것도, 컴퓨터의 데이터도. 뭐든 간에 내게 필요한 것만 안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필요한 기본 티는 여러 장 샀지만 외투는 사지 않았다. 옷은 내 방에 있기에 부피가 너무 크고 이미 있는 옷을 입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내가 필요한 사람들만 곁에 있다. 사실 이 모든 건 관계에서 출발했던 비움이었다.
돈을 잘 쓰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에 아끼지 않는다. 이제껏 늘 무조건적이고 강박적으로 소비를 억제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올해 생긴 이 습관이 꽤나 반갑다. 튼튼한 요가 매트를 사고, 가볍고 통기성 좋은 메이커 운동복을 사고, 출퇴근길에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사고, 운동을 더 재미있게 해주는 스마트 워치를 사고, 환경을 보호하는데 일조할 수 있기에 값나가도 마음에 드는 텀블러를 사고, 자기 계발을 위해 몇십만원 하는 강의를 할부로 결제하고 태블릿 pc를 사서 종이를 아끼면서 기분 좋게 공부를 하고. 오백 원 비싸서 먹지 않았던 슬라이스 치즈가 하나 올라간 분식을 이젠 대담하게 주문하는 일. 정말로 필요한지 아닌지, 나의 미니멀리즘 철학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내 물건을 살 때는 고민을 오래 하지만 친구들과 가족들의 선물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것. 한 병에 사천 원 하는 소주를 마실 수도 있지만 한 잔에 만 오천 원 하는 좋은 위스키를 한 잔 마시는 것. 그 모든 게 나를 더 여유롭게 했다.
술과 담배를 줄였다. 남들은 내 줄어든 음주량을 보고서 여전히 비웃음을 날리지만 뭐 어때. 나는 남들과 비교하는 게 아니라 나의 지난날들과 비교할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마신다. 취하지 않을뿐더러 필름이 끊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술을 좋아한다. 반주를 자주 하고 친구들과 만나서도 적당히 한두 잔 즐길 줄 안다. 그러니까 현명하게 마시고 있다는 말이다. 흡연도 마찬가지다. 원한다면 피우겠지만 술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줄였고 이제는 거의 끊어냈다. 광주에 간 구월 이후로 담배 피운 횟수가 다섯 번도 안 된다. 건강해지고 싶은 것도 있고, 화나고 짜증 나는 걸 담배로 풀고 싶지 않아 졌기 때문인 것도 있다. 혹은 다른 스트레스 해소 방법들을 많이 찾아서겠지.
채식을 한다. 아직은 페스코 단계의 채식을 하고 있다. 다만 해산물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어도 충분히 공장식 축산업과 수산업의 행태를 알아버린 이상 경각심을 갖고 식자재를 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계란과 유제품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들과 생태계에 해를 끼치는 팜유, 정제 설탕과 같은 모든 식자재에도 해당된다. 마트에 가서 무조건 저렴한 걸 고르는 게 아니라 그 식자재들이 어떻게 해서 내 눈앞에 있는지 과정을 생각한다. 물건과 음식을 고르는 데는 그 사람의 가치관이 반영되는 거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지난 삼 년 동안 채식을 시도하다가 늘 실패했다. 고기를 좋아하는 애인이나 친구 앞에서 채식하는 게 미안했고, 어쩔 수 없이 고기를 같이 먹었다. 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미안해야하는 건 그들이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젠 내 가치관과 내가 가지는 믿음이 그들의 기분 보다 중요하다.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나고 이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채식을 이해해준다. 말은 안 해도 그 배려가 늘 고맙다.
요가를 사랑하게 되었고 달리기에 재미를 붙였다. 올 초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던 나의 몸과 마음을 지탱해준 것 중 하나가 요가였다. 매트 위에서 감정이 북받쳐 수없이 울었고 울고 나면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으로 수련을 마쳤다. 요가가 있어 다행이라고 요즘도 자주 생각한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우울은 수용성이라고 믿는 나는 격한 운동을 하면서 땀을 흠뻑 흘리고 샤워를 하면 전보다 가벼워진 기분을 느낀다. 달릴 때 늘 불편한 무릎과 어깨와 복부는 나아질만하면 다시 아파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땀을 내고 가쁜 숨을 내쉬며 나의 일부를 완전히 소진했다는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 아닐까. 올해 우울할 때면 요가 매트를 펴거나 가벼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달렸다. 그게 나를 살게 했다.
생일을 평범하게 보냈다. 중학생 때 이후로 내 생일은 늘 우울과 함께였다. 새벽부터 밤까지 그냥 울기만 했던 지난해 생일도 있다. 이유도 불분명했다. 아마 태어난 게 죄처럼 느껴져서였던 것 같다. 생일이 다가오는 게 싫었고 남들이 내 생일을 잊는 게 당연했고 그러면서도 괴로웠다. 그런데 올해 생일은 그렇지 않았다. 남들과 비슷하게 보냈다. 친구들에게 축하를 받고, 선물을 받고, 가족들과 케이크를 나누어 먹고 그리고 나는 당연하게 그 사소함에 감사해하고 또 즐거워했다. 그러면서도 전날과 똑같이 요가를 하고 공부를 하고 좋아하는 영화를 봤다. 태어난 날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 보통의 생일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모른다.
나 자신을 받아들였다. 나로 태어난 이상 나로 살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유약한 사람인지 인정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이 모든 변화가 시작됐다고 믿는다. 올해 내내 유행한 MBTI.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내 성격 유형 설명이나 짤들은 찌질하기 짝이 없었다. 볼수록 참 싫었다. 내 성격과 내가 살아온 방식과 내 인간관계와... 그냥 내 모든 게 싫었다. 벗어나고 싶어서 한 달에도 몇 번씩 성격 검사를 했다. 얼마나 집착을 했던지 한두 번 다른 게 나오긴 했는데, 그 다음엔 결국 원래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나였다. 내가 인정하지 못하던 나 그랬더니 아름다워보이던 내 모습 .
위의 모든 일들은 사실 상상도 못 할 변화였다. 이 보통의 평범한 날들은, 계절이 지날 때마다 벼랑 끝에서 흔들리던 나를 잡아주신 J 선생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위로와 지지를 보내준 친구 H, 올 초부터 내 어떤 바닥도 견뎌준 동생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누릴 수 없었을 테다. 이들 뿐만 아니라 늘 곁에 있어준 부모님과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친구들의 조건없는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없었을 나의 소중한 2020.
그 밖에 여기에 쓸 수 없었던 더 많은 이야기들.
내년엔 더 멋질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