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무카이 사토시는 위험한 약속을 했다. 누군가를 위해, 범죄자 두 명이 출소하고 나면 복수해주겠다고 한 것. 오랜 시간이 흐르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성실한 바텐더로 살아온 그에게 협박 편지가 도착한다. 그 두 사람이 출소했으니 약속대로 죽여달라는 내용이었다. 오래전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 내린 무카이는 15년 전의 사람을 찾아가 보지만, 편지의 주인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결말이 포함된 스포일러 주의※
출판사의 소개 글에 '이 작품에는 수많은 복선이 깔렸는데, 무심코 지나친 소품이나 에피소드가 뒤에서 의미를 갖고 연결되어 아귀가 들어맞는다.'라는 대목이 있다. 실제로 등장인물의 짧은 대사, 행동에 나름의 의미가 담겨있어 허투루 지나치기 힘들다. 가령 예를 들자면, 무카이의 협박범이 누군지 알려주는 복선은 꽤 초반부터 꾸준히 나온다. 그는 무카이와 언제 처음 만났는지 거짓말하고, 무카이의 가족을 어려워하고, 일부러 주인공에게 여유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아직 실력이 없는 아르바이트생을 열심히 가르친다. 고개를 잠깐 갸웃거렸거나, 별 생각 없이 지날 수 있는 부분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나?
이렇게 복선을 치밀하게 짜놓은 책은 결말을 다 알고 다시 읽어도, 부분 부분을 음미해나가는 재미가 있다. 평범해 보여서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대목에 큰 뜻이 숨겨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니 15년 전 사건도 궁금하고, 무카이가 협박범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지, 협박범은 정말 누구인지 궁금해져서 페이지를 휙휙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350페이지까지 잘 쌓아 올렸던 서사는 마지막 20페이지에서 무너진다.
알고 보니 진짜 협박범은 무카이의 동업자였다. 10년 넘게 동업해 온 오치아이는 왜 협박을 했을까. 무카이는 약 15년 전에 히데미라는 여성의 집에 무단침입한 적이 있었다. 그 날 이후로 히데미는 자살을 선택한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 대목에서 이미 추측했겠지만, 실은 오치아이가 히데미의 남자친구였다. 두 사람이 동업하게 된 것도 오치아이가 복수를 위해 무카이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터가 있을 수 있나. 알고보니 주인공의 동업자는 주인공에게 피해를 당했던 여성의 남자친구였고, 동료 중 한 명은 그 여성의 어린 아들이라고 한다.
그럼 오치아이는 어떻게 무카이를 찾아온 걸까. 오치아이는 과거에 주인공이 히데미를 겁탈하고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범죄피해자 단체에서 딸을 잃은 한 어머니와 친해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무카이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 여성을 만나게 되고 덕분에 오치아이는 복수를 계획할 수 있었다.
그런데... 히데미 사건에는 또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무카이가 히데미 집에 들어간 것은 맞았지만,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사건 전개도 너무 억지스럽다. 히데미 집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지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히데미의 어린 아들과 함께 옷장에 숨다니... 세상 어느 강도가 그런 행동을 할까.
거의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다고 느끼면서 책을 읽었지만, 책을 덮으면서는 너무 아쉽다고 느꼈다. 특히 꼬아도 꼬아도 너무 꼬았다고 느꼈다. 협박범이 누군지 밝혀지는 부분도 좀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극적인 전개와 반전에 올인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마무리 지었으면 더 좋았겠다.
전체적인 감상평
15년 전 했던 약속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다는 독특한 소재에, 촘촘하게 넣어놓은 복선 덕에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무리수를 끼얹은 결말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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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이렇게 마무리하기는 너무 아쉬워요. 대신 다른 좋은 작품들을 추천해드립니다.
먼저 '돌이킬 수 없는 약속'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더 짜임새 있는 작품인 '천사의 나이프'을 읽어보세요. 소년범들에게 살해당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보여줍니다. 사건을 파헤치다 보면, 과거의 진실에 한 발짝 다가가게 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또, 같은 작가의 '침묵을 삼킨 소년'도 읽어볼 만합니다. '천사의 나이프'와는 반대로 소년범을 둔 가해자 가족을 그린 소설로, 사건 전개보다는 심리 묘사에 더 중점을 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