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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Sep 20. 2021

말하기 힘들었던 지도위원 소식

나의 유년시절 이야기


말하기 너무 무서워서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벽에 기대 서서 내내 고민했다.


국민학교 5학년.

학기 초 학급을 이끌어갈 6명의 지도위원을 뽑았다.

이전 같으면 반장, 부반장 2명이면 됐지만, 총 6명의 심부름꾼을 차출하여 학급의 대소사를 책임지게 했다.

얼떨결에 추천되어 칠판에 이름이 적히고, 장난처럼 지도위원에 당선이 되었다.

아이들의 축하 박수 속에 간단한 소감을 밝히고 나는 이내 말이 없어졌다.


‘집에 가면 엄마, 아빠께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지.’


마음속에는 온통 이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걱정만이 가득했다.


엄마는 아빠의 택시 벌이로는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해결되지 않아 공장에 다닌 지도 꽤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어려서 챙겨줄 사람이 없다 보니 시간제로 짧게 일을 갔는데 이 무렵에는 전일제로 일을 시작했다.

집에서 먼 동네에는 그나마 체계도 갖추고 급여도 조금 더 높았지만 집에서 멀리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빠 때문에 가까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동네에 단추공장이 하나 있어서 그곳으로 일을 하러 갔었는데, 먼지도 너무 많고 일이 맞지 않아서 사출공장으로 옮겨 다니고 있었다.

집에서 도보로 3분 남짓 거리에 있어서 점심시간에 짬짬이 와서 나와 동생, 그리고 외할머니까지 챙기고는 다시 공장으로 가서 일하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엄마는 이를 악물고 이 월세살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인아주머니께 부탁을 해서 매월 3만 원이나마 보증금에 추가해가면서 월세를 깎고 있었다.

지독한 삶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든 나가고 싶은 몸부림 하나로.

아빠는 택시를 하며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로웠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을 장을 봐오는 일이 없는 위인이었다.

덕분에 엄마는 매일 공장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도 저녁에 장을 보기 위해 먼 시장까지 일부러 나갔다가 오고는 했다.

그 와중에도 아빠는 계란 프라이도 못하면서 항상 반찬투정만 지독하게 해댔다.

물먹은 스펀지처럼 피로가 가득 흡수된 몸을 이끌고 장을 봐오고 음식을 하고 다시 아침이 되면 일을 나가셨다.

날이 지날수록 엄마의 삶에 대한 피로도는 높아가기만 해서는, 결국 냉장고에는 반찬다운 반찬이 있을 수 없었고, 우리를 챙길 수 있는 마음의 여력도 없었다.

늘 날이 서있고, 무섭고, 고함치며 얘기하는 엄마가 어느 날 곱게 이름이라도 부르면 뭐 때문에 이름을 부르시는 거지 하는 마음에 순간 두려움으로 얼음이 되고는 했다.


천 원짜리 한 장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엄마 앞에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갈라지고 부서지고 흩어졌다.

다른 친구들은 자랑스럽게 전할 소식을 두려움에 휩싸여 말을 해야 했다.

학급 대표가 되면 선생님들도 챙겨야 하고, 소풍이나 운동회 같은 행사에도 돈을 더 쓰게 되어 있고…….

그런 비용적인 문제가 가슴을 압박해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가 공장일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큰 방 벽에 기대서서 한참을 서있었다.

마치 벌서듯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고는 말했다.


“엄마, 저 학급 지도위원 됐어요.”


“그게 뭐고?”


“뭐 반장, 부반장 같은 그런 거예요.”


“돈 들어가는 거 아니가? 쓰잘데기 없는 걸 했네.”


“……”


역시나 예상대로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 집에는 하등 도움도 안 될 그런 소식.

바로 후회했다.

선생님께 그냥 기권한다고 할 걸.

뭐하러 입 닫고 가만히 있었을까.


그렇게 나는 또 상처를 받고, 마음에 바윗덩어리 하나를 무겁게 얹고 눈물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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