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사려니 숲길과 오설록 녹차밭

by 본격감성허세남

조식이 포함되어 있는 숙소인데 그 조식이 희한하게 카페의 음료와 샌드위치다. 카페 <투썸 플레이스>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숙소라 그곳이랑 뭔가를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투썸은 서울에서는 굉장히 싫어하는 브랜드다. 쓸데없이 비싸고, 겉은 번지르르한데 맛이나 그런 건 특별히 맛있지도 않은, 딱 내가 싫어하는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가진 그런 카페라서 싫어했다. 그런데 여기서의 투썸은 좋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딘가로 조식을 먹으러 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데, 카페 조식이라 가지고 와서 방에서 먹어도 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맛은 역시나 그럭저럭 이지만 무료고, 게다가 어제보다 더 좋은 날씨에 모든 것이 용서됐다. 방에 딸린 작은 테라스의 탁자에서 여유롭게 아침을 먹는 멋진 풍경 속에 우리 부부가 있었다.


수인이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가 보다. 침대 위에서 아주 활짝 웃는다. 어제보다 한층 더 쾌활해진 웃음이다. 간밤에 잠도 잘 잤고, 특별히 아픈 곳도 없다. 이건 뭐 걱정했던 엄마 아빠가 무안해질 지경이다. 서울에서보다 더 잘 놀고 더 잘 자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그래서 마음이 더 편안하다.


첫날과 달리 제주도에서의 온전한 하루. 나가기 전에 오늘은 무엇을 할지 아내와 함께 진지하게 의논했다. 둘이 왔을 때랑 완전 다른 느낌이라 일단은 정하고 나가야 했다.


"박물관 많이 생겼던데 그런덴 좀 의미가 없겠지?"

"응. 수인이가 혹시라도 울면 바로 나와야 됨."

"바닷가 가볼까?"

"좀 추울지도 모르고, 가서 크게 할 일도 없잖아?"

"우도에 들어가 볼까?"

"배는 아직 좀 무리일 것 같아."


결국 할 것은 산책밖에 없었다. 기왕에 산책할 거, 좋은 곳에 가서 제주도의 녹색이나 마음껏 즐기고 수인이에게도 보여주기로 했다. 우리 둘 다 산책을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이 사려니 숲길과 오설록 녹차밭이었다.


몇 년만에 다시 찾은 사려니 숲길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주차장에 자리도 없어서 길가에 잠깐 댔다가 입구까지 걸어온 사이에 자리가 났기에 얼른 달려가서 차를 가지고 오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주차 자리를 맡아주고 이런 건 전혀 가능성이 없을 텐데 어린아이를 보니 주차 요원이 먼저 자리를 맡아 주었다. 어린아이와 함께 다니면 주변 사람들이 친절해지고 상냥해진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의 장점이랄까. 참 고맙습니다.


유모차를 가지고 오긴 했지만 숲길은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에 매우 불편했다. 길이 울퉁불퉁해서 덜덜거리며 가다가 심한 곳에서는 안고, 다시 유모차에 태우고 하는 식으로 산책을 다녔다. 멀리 가기도 힘들어서 천천히 가까운 곳들만 돌아다녔다. 그래도 아쉬움 없이 한없이 평화롭고 즐거웠던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아쉽기는커녕 이렇게 좋은 숲에 함께 올 수 있고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 수인이도 상쾌한지 숲에서만큼은 잠을 자지 않고 천천히 아빠 엄마와 함께 즐겼다. 시간이 더 흘러서 수인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는 손 잡고 천천히 걷고 뛰고 할 수 있을 텐데. 다음에 수인이가 크면 꼭 다시 한번 같이 와야겠다.


숲속을 걸어요.
엄마와 딸, 그리고 숲길.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면 큰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된다. 그래서 몸이 오히려 편할 때도 있다. 오전에 사려니 숲길에 갔다가 서귀포 쪽에 들러서 점심을 먹고, 오설록 녹차밭으로 향했다. 오늘의 일정은 이렇게 딱 두 가지. 수인이는 차에서 또 잠이 들었다. 중간에 적절하게 기저귀 갈아주고 분유만 타서 잘 준다면 칭얼거림도 없이 잘 다닌다. 이 정도면 훌륭한 여행 파트너 아닌가. 우리 부부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이렇게나 예쁜 아기가 이렇게 착하기까지 하다니. (세상의 모든 콩깍지가 다 눈에 씌었다 해도 할 말은 없다)


오늘의 화룡점정은 완벽한 날씨. 덕분에 파란 하늘과 초록의 녹차밭의 조화가 눈이 부시다. 윈도우 배경화면 속으로 들어온 줄? 시원한 곳에서 녹차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밖에 나와서 산책하고, 녹차밭에 가서 수인이와 함께 사진도 찍고. 신선놀음도 이런 신선놀음이 없네. 이 맛있는 것을 아빠와 엄마만 먹고 있으니 그게 또 미안하긴 하더라. 어차피 못 먹을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왠지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을 보니 나도 아빠가 됐나보다. 부디 수인이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안정적인 아이로 커 나가길. 옆에서 손가락 장난감에 빠져있는 수인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윈도우 배경화면 같았던 날

6월 초의 살짝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꽤 오랜 시간 동안 녹차밭에 있었다. 한 것은 산책, 또 산책. 누군가가 제주도에 가서 무엇을 했냐고 하면 오로지 산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주도가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혼자 하는 산책은 그 장소에 더 집중이 되지만 함께 하는 산책은 장소보다는 옆의 사람에 더 집중하게 된다. 사려니 숲길에서도, 녹차밭에서도, 산책을 하면서 아내와 평소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 부부와 제주도와 수인이에 대해서. 아마도 떠나지 않았다면 못 했을 그런 대화였던 것 같다. 수인이 덕분에 새로운 여행의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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