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하는 것들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신기한 경험

by 본격감성허세남

수인이가 태어나기 전 여름에 마지막으로 하는 혼자 여행을 허락받아서 왔던 곳이 제주도였다. 혼자서 스쿠터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그때 다음에 수인이가 태어나면 꼭 함께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곳이 제주도 서쪽의 수월봉이었다. 보통의 오름이나 산과 다르게 자동차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어서 아이가 오더라도 무리가 없었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 압권인 그런 곳이었다.

사진 2014. 9. 20. 오후 3 39 04.jpg 혼자 왔을 때의 모습. 저 모녀가 참 부러웠다.

그저 막연한 바람일 뿐이었는데,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왔다. 바람이 조금 불긴 하지만 다행히 날씨도 좋아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 좋은 환경.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언제나처럼 한산한 수월봉 정상에서 수인이는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생각을 하긴 할까? 어린아이의 머릿속은 전혀 알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넓고 푸른 바다가 어딘가 모르게 좋은 영향을 주었기를 바란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를 본 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수인이는 나중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네. 제주도의 수월봉이라고. 순간 살짝 부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어차피 어린아이는 기억을 하나도 못 한다고, 그래서 여행은 아이한테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맞다, 어차피 기억은 못할 거다. 비행기 탄 것부터 해서 제주도까지 아마도 수인이의 기억 속에는 하나도 남지 않겠지. 그래도 꼭 직접적으로 기억은 못 하더라도 그런 사소한 경험들이 커가는 아이에게 어떤 모습으로든 반영될 것으로 믿는다. 똑똑한 아이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건강하고, 조금 대범한 아이를 바랄 뿐. 그리고 최소한 아빠 엄마에게는 소중하게 남으니까. 처음이라 모든 것이 신기하고 소중한 시간들이다. 셋이서 가족사진을 하나 찍었다. 어디를 가든 가족사진 정도는 최대한 많이 남겨놔야겠다.


아이와 함께하는 건 확실히 신경 쓸 것이 굉장히 많긴 하다. 아직 어른과 같은 밥을 같은 때에 먹지 못하고 하루에도 여러 번 먹어야 하기 때문에 당장 수유부터가 문제다. 늘 뜨거운 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곳곳에서 분유를 타서 식힌 후 먹일 수밖에 없는데 수월봉에서도 그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신기하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고 그런 기분이었다. 야외에서의 수유라니, 아직 아빠 엄마 모두에게 신기한 경험이다. 수인이가 어디서든 잘 먹어주니까 그건 참 다행이야.


3-2.jpg 수월봉에서 우리 세 가족
3-3.jpg 많이 먹으렴 :)

저녁을 해결하고 숙소로 가기로 해서 제주 시내 쪽의 이탈리안 피자집으로 갔다. 언젠가부터 제주 향토 음식이라는 것이 붙은 것들은 오히려 잘 먹지 않게 됐다. 그냥 맛있는 것을 먹으면 되지 뭐. 예전에 제주에 살던 지인분과 함께 왔던 곳인데 그때 기억이 좋아서 아내에게도 맛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찾아갔다. 이동하는 동안 잠에 빠졌던 수인이는 음식점에 도착하니까 깼다. 바구니형 카시트채로 들고 와서 테이블 옆에 두고 간단한 장난감과 함께 놀아주며 우리는 피자와 파스타를 먹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 맛있다고 생각하며 기분 좋게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나지 않아?"


으악. 수인이가 똥을 싼 긴급 상황. 아이가 똥을 싸는 것이 뭐 새로운 일이겠냐마는 여기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게다가 식사 중. 나름 괜찮은 컨디션의 화장실이 있긴 했지만 기저귀 갈이대 같은 건 전혀 없으니 치우기가 난감했다. 결국 민폐를 무릅쓰고 자리에서 기저귀를 갈고, 화장실 가서 찬물로나마 씻겨주었다. 우아하게 피자를 먹다가 똥을 치우다니, 이런 경험은 우리 역시 또 처음이다. 주변 사람들도 아이니까 그러려니 했겠지만 아빠 엄마는 아직 이런 것까지는 익숙하지 않다. 어린아이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저녁을 대충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짐 정리하고 나니 수인이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잠시 혼자 나와 산책을 했다. 달은 밝고, 불이 켜진 숙소를 보고 있자니 괜히 흐뭇해졌다. 첫 여행, 첫째 날, 그래도 즐겁게 잘 했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려줬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인데 즐거우지 않을 리 있나. 오길 참 잘했다.


3-5.jpg 깔끔하고 좋았던 우리의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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