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행 후에 남은 것들

by 본격감성허세남

2박 3일간의 짧은 여행은 생각보다 금방 끝나버렸다. 김포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수인이는 얌전히 잘 왔다. 기압차 때문에 혹시 아프진 않을까 입에 쪽쪽이를 물려줬더니 그걸 시종일관 쪽쪽 빨면서 스튜어디스 언니들에게 살짝 웃어 보이기도 하며 자연스레 비행을 마쳤다. 갈 때와 올 때 모두 이렇게 잘 왔으니 이제 수인이 데리고 비행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정말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복덩이롤세, 우리 딸.


짧았던 여행이었지만 그 여행이 남긴 것들은 많았다. 처음이라 모든 것이 다 새로웠고, 그래서 더 인상 깊게 남게 된 것 같다.


용기


비록 태어나서 6개월 동안 한 번도 병을 앓거나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연약한 아이이기에 걱정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혹시 아프면 어쩌지, 비행 스트레스 때문에 분유 먹는 것이 탈이 나면 어쩌지, 갑자기 우유토를 많이 하면 어쩌지, 가서 우는 아이 달래느라 그냥 숙소에만 있다가 오는 건 아닐지 등등. 늘 그렇듯이 걱정은 하면 할수록 많아졌다. 그런데 한 번 다녀오고 나니 모든 걱정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큰 용기가 생겼다. 우리 수인이는 생각보다 강하고 어쩌면 아빠를 닮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확신 같은 것이 생겼다. 4개월 후에 떠날 독일 여행의 예행연습으로 제주도를 택했던 것인데 그 예행연습을 완벽하게 해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물론 그 뿌듯함은 온전히 우리 딸의 몫이다.


역시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 제주도 덕분에 앞으로 수인이 인생에서 아빠 엄마와 함께 여행할 시간이 더 많아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앞으론 무서울 것이 없겠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자연스레 짐이 많아진다. 아무리 줄이고 줄인다고 해도 우리 역시 평소보다 짐이 훨씬 더 많았다. 그렇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준비하지 못한 많은 상황들에 맞닥뜨리게 된다. 유모차에서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급하게 타서 먹이고, 밥 먹다가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 화장실에서 똥 싼 아이의 엉덩이를 씻기고, 차에서 쪽잠을 재우고. 서울에서라면 상상하기 힘든 그런 환경들과 마주해서 대응할 때마다 의외로 잘 해나가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보고 우리 스스로가 참 놀랐다. 아이는 신경 쓸 것이 많은 존재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하게 딱딱 맞지 않아도 잘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달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먹는 물 조금 바뀌고, 잠 조금 덜 편안하게 자고 하면 어때. 상황에 맞게 잘 키우면 되지. 덕분에 살짝 너그러워진 것 같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온전한 시간


어린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을 처음 꿈꿨던 계기가 오소희 씨의 책이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아들과 함께 세계의 많은 곳들을 의연하게 다니는 오소희 씨의 모습을 보고 참 멋지다고 생각했고, 나도 언젠가는 꼭 저렇게 용기 있게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 그런 여행이 특히 부러웠던 이유는 어디를 간다는 것보다 시간을 완전히 함께 보낸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는 우리 가족을 떠올렸다. 아이는 아빠가 돌아오기 전에 잠들고 아이가 깨었을 때 아빠는 이미 회사에 가고 없다. 어느 날 아이는 왜 아빠를 볼 수 없느냐고 울면서 묻고, 어느 날은 밤 10시가 넘어 들어온 아빠를 반기며 "아빠가 일찍 들어와서 너~어~무 행복해!"를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한다. 시간적 의미에서, 우리 가족은 오래전 가족의 정의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무수한 말다툼과 현실에 대한 타협과 복종이 있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다니는 여행을 보며 아빠는 뭘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다. 저런 아빠의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인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이라고 해서 그게 꼭 바람직하다는 말은 아니다. 저런 모습이 과연 좋은가? 내가 다니는 직장은 훨씬 덜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한 건 변함이 없다. 모바일로 언제나 연결된 시대가 된 이후론 그런 현상이 확실히 더 심해졌다.


여행이 좋은 건 늘 마주하는 일상의 환경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여행을 가면 그 시간이 대부분 여행지에 할애되지만 가족과 함께 가니 가족에게 대부분이 할애되었다. 특히 우리 딸에게. 제주도에서 특별히 무언가를 많이 한 건 없다. 모두 다 가본 곳들이었고, 특별한 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순간순간이 소중했고 행복했다. 이렇게 모든 시간을 아내와 수인이와 함께 보내본 것이 얼마만인지. 출산 초기에는 너무나도 정신이 없었으니 그 이후로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웃는 수인이의 모습을 보면 나도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도 이제 완전히 아빠가 됐나 보다.


살다 보면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딸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앞으로 더 열심히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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