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는 법을 배워간다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와 함께한 여행이 벌써 2주가량이 됐다. 그동안 참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다. 뉘른베르크는 처음 가는 곳이라 산책만 해도 충분히 할 거리가 많았고, 뮌헨은 여러 번 간 곳이라 친구 집을 방문하는 등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반면에 베를린은 기존의 도시들보다 훨씬 더 다양한 매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쉬움도 더 커지는 것 같다. 베를린에서 느낀 아쉬움에 대해 적어본다.
일요일마다 열리는 벼룩시장
독일은 일요일만 되면 상당수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심지어 슈퍼마켓도 문을 닫는 곳이 대부분이라 토요일에 장을 봐놓지 않으면 낭패인 경우도 생긴다. 대신 일요일엔 벼룩시장 같은 것도 많이 열리는데 베를린에 굉장히 큰 벼룩시장이 열린다기에 찾아가 봤다. '마우어파크 벼룩시장'이라는 이름의 곳이었는데 듣던 대로 정말 컸다. 레고 캐릭터들만 파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저걸 누가 사나 하는 오래된 물건들을 파는 사람도 있고, 각종 먹거리도 팔았다. 넓은 공원 군데군데엔 자유롭게 연주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가 갔을 땐 한쪽에선 줄타기 공연도 하고 있었다. 참 볼거리가 많은, 만약에 우리 둘이서 왔다면 아마 반나절쯤은 훌쩍 지나갔을 그런 공원이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수인이가 있었다. 아직 걷지 못하기에 유모차를 타고 다니는 수인이. 바닥은 울퉁불퉁해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 어려웠고, 사람이 붐비는 곳엔 차마 들어갈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멈춰서 무언가를 보려고 한다면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는터라 오랫동안 무언가를 보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금방 나와버렸다. 기대를 많이 했던 그런 곳이었는데 잠깐 둘러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인아 저거 봐봐. 예쁜 인형을 팔고 있네."
"끼야아아(얼른 움직이자!)"
별 수 있나. 마우어파크 벼룩시장 앞에 <Bonanza Coffee Heroes>라는 카페의 커피가 참 맛있어서 조금은 위안이 됐다.
쇼핑의 어려움
수인이는 쇼핑을 싫어한다. 뉘른베르크에서 하루 종일 비가 온 날에 쇼핑몰에 갔다가 확실히 깨달은 바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베를린에서 쇼핑을 시도해봤다. 마우어파크에서 빨리 나온 김에 <Mall of Berlin>이라는 큰 쇼핑몰에 가서 플레이모빌이랑 수인이 옷 좀 구경할까 했지만... 역시나 어려웠다. 수인이는 확실히 쇼핑을 싫어한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그걸로 달래며(물론 아직 너무 일러서 조금만 준다) 구경을 해보려고 했지만 잠시뿐, 결국엔 쇼핑몰에서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날따라 낮잠도 길게 자지 않았던 수인이. 확실히 국토대장정형 아이가 맞다. 밖에 나와서 걸으니 또 금세 좋아했던 것을 보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베를린 필의 연주
베를린에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니가 있다. 이전에 혼자 베를린에 왔을 때 베를린 필 콘서트홀에서 '비발디 사계'를 비롯해 바로크의 현악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소규모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너무너무 좋았기에 언젠가 아내와 꼭 한 번 오고 싶었다. 마침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베를린 필의 연주회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본다면 어마어마한 가격이지만 훨씬 저렴하게, 굉장히 좋은 콘서트홀에서 볼 수 있었던 다시 오기 힘든 절호의 기회!
물론 못 봤다. 이것이 가장 아쉬웠다. 쇼핑, 벼룩시장 등등은 모두 감수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베를린 필의 연주 아닌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우리 부부가 정말로 기대했던 그런 공연인데. 눈앞에 두고 정작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혹시나 엄마 뱃속에서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어온 수인이가 가만히 있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분명했다. 아쉬운 마음, 사진으로나마 달랠 수밖에. 아내와 함께 언제 다시 베를린을 갈 수 있을지. 아쉽고 또 아쉬웠다.
즐겁게 다닐 수 있는 이유
그래도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즐겁다. 회사 가지 않고 가족과 함께 외국에서 보내는 일상은 얼마나 좋은지. 얼마 후에 돌아가면 어떻게 할지가 또 걱정이지만 일단 나중 걱정은 나중으로 미뤄놓고 있다. 수인이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다른 즐거움이 있기에 아쉬움은 금방 잊힌다. 물론 다른 즐거움 중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도 괜찮은 이유는 수인이다. 나는 아빠니까. 특별히 되뇌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을 보면 내 아이란 존재가 신기한지. 아직도 가끔씩 깜짝 놀란다.
수인이는 한국을 떠나왔을 때보다 부쩍 큰 느낌이다. 베를린에서 부터는 <괜찮아>라는 책을 새롭게 집중 탐구하고 있다. <개구리가 폴짝>에서는 "풍덩~"을 해줘야 했다면 <괜찮아>에서는 하나하나 다 읽어줘야 한다. 그럴 때 꺄르륵 웃거나 눈을 초롱초롱하며 바라보는 수인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감사하게 됐다.
하루는 숙소에 있는 오븐으로 소시지 구이에 도전해봤다. 닭다리를 사 와서 오븐에 조리하고, 밥을 하고, 샐러드와 스페인산 단감을 준비하고, 마지막으로 늘 사용하던 프라이팬 대신 오븐으로 소시지를 구워봤는데 깜짝 놀랄 맛이었다. 소시지가 좀 좋은 것이기도 했지만 이건 순전히 오븐 덕분이다. 포기하는 것들도 많지만 이렇게 소소한 즐거움도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