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거리며 시간 보내기
주말이다. 독일에서 맞는 두 번째 토요일. 첫 번째 토요일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없이 보낸 반면에 이번 토요일은 정말 주말처럼 보냈다. 베를린에서는 일정도 훨씬 더 여유가 있기에 그랬던 것 같다. 서울에서처럼 적당한 시간에 일어나고, 적당히 집에서 시간도 보내고, 오후에는 밖에 나가서 돌아다녔다.
숙소가 옛날의 서베를린 지역에 있기에 이번에는 동베를린 지역으로 가봤다. 지금이야 하나의 도시라지만 동/서독이 분리되어 있었을 때는 도시 하나도 동과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니.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확실히 건물들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다. 서베를린 지역에 비해 덜 화려하고 소박한 느낌이다. 우리가 갔던 Warschauer역 근처가 베를린에서 가장 힙한 곳이라고 한다. 길거리에서 페스티벌 같은 것도 열리고 그런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점심 즈음이라 그런지 그저 여유로운 곳이었다.
이 날도 날씨가 좋았다. 기온은 날이 갈수록 조금씩 더 오르는 것 같다. 따뜻한 태양 아래에 슈프레 강이 펼쳐져 있고, 그 강변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자유롭게 누워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뒤에는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서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East Side Gallery라고 불리는 곳도 여기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 오늘이야말로 정말 토요일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이라는 이름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그런 토요일. 주말엔 역시 빈둥대야 한다. 그건 늘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인의 숙명이다. 문득 한강이 그리웠다. 서울에 돌아가면 주말에 한강에 가서 저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봐야겠다.
강변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베를린의 명물이자 독일 어디 가나 파는 Curry Wurst를 파는 곳이 있었다. 서역에 있는 집이 사람들에게 유명하던데 이곳이 훨씬 더 맛있었다. 저 소스와 소시지 가지고 가서 한국에서 팔고 싶네. 그럼 잘 팔리지 않을까! 늘 상상뿐. 어쨌든 베를린에 오면 Curry Wurst를 먹어야 한다.
수인이가 낮잠을 자는 기회를 틈타 이번엔 전에 못 갔던 브란덴부르크 문 쪽으로 갔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Unter Den Linden 거리를 따라 베를린 돔까지 걸었다. 중간에 카페가 나오면 잠깐 들어가서 따뜻한 커피도 마시고, 수인이와도 놀아주고, 다시 또 나와서 걷고 하다 보니 금방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한국에서의 주말과 크게 다를 건 없다. 다만 위치가 독일로 옮겨지니 새로운 볼거리가 많이 생긴 정도의 차이는 있다. 여기에 계속 살면 이런 것들도 점차 지겨워지겠지?
독일에 와서 요리하는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 '요섹남'은 아니고 그냥 요리하는 남자. 저녁으로 펜네 파스타를 준비했다. 거기에 바게트 빵과 주스와 양배추 샐러드와 스페인산 단감을 곁들였다. 맥주가 빠질 수 없지. 특별히 베를린의 축구팀인 '헤르타 베를린'을 위해 나온 스페셜 에디션이다. 별 것 없는데 뿌듯한 그런 모습이다. 파스타가 대중화된 건 얼마나 축복인지!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서역 근처의 <Kaiser's>라는 새로운 슈퍼마켓에 도전해봤는데 정말 만족스러웠다. 전부터 자주 이용하던 Lidl보다 더 고급스러운 컨셉이라 그런지 진열도 훨씬 깔끔하고, 제품들도 가격이 조금 더 나가긴 하지만 더 고급스러워 보이고. 이후에 베를린에 머물면서 참 많이 이용했던 곳이다. 독일에서는 여러 슈퍼마켓 체인을 둘러보는 것도 참 좋은 볼거리다. 우리처럼 장보는 걸 좋아하는 커플에겐 참 좋은 나라다.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나가서 따뜻한 햇살 받으며 걷기도 하고, 중간에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저녁엔 파스타와 맥주로 마무리하는 멋진 주말. 여행이라고 해서 특별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특히 더 그렇다. 그래도 이렇게 만족스럽고 좋은 건, 역시 일상을 완전히 떠나왔기에 몸과 마음 모두 한없이 편해서일 것이다. 모든 조건에서 해방돼서 온전히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매력, 그것이 여행의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여행이 좋다.
오늘의 수인이. 컨디션이 참 좋다. 날씨에 따라서 수인이도 점점 좋아지나 보다. 독일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 시차 적응을 걱정했는데 지금까지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아마도 첫날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자마자 무언가를 하지 않고 바로 잠을 자서 도움이 됐을 것 같다. 네가 좋으면 아빠 엄마는 그저 좋단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역시 우리 아이. 많이 웃어주렴.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