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매력 이야기
베를린에서 총 7박을 보냈다. 그 어느 도시보다도 오랫동안 있었지만 그 어느 도시보다도 흥미로웠다. 덕분에 아이와 함께 다니면서 그냥 주변을 구경만 해도 한 번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베를린의 가장 큰 매력은 한 도시에 공존하는 다양한 얼굴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건물들
베를린에는 따로 '구시가지'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 바로 이전에 있었던 뮌헨(독일에서 3번째로 큰 도시)만 하더라도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명소들은 신시청사를 중심으로 한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베를린은 그런 곳들이 곳곳에 분산되어 있다. 게다가 과거 동과 서로 나눠져 있었던 역사 덕분인지 각 지역의 건물 모습들도 상당히 다르다. 마치 새로운 도시에 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포츠담 광장의 현대적인 모습, 브란덴부르크 문을 시작으로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를 따라 이어지는 전형적인 오래된 건물들, 동베를린 지역의 동독의 향기가 느껴지는 건물들 등. 독일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이자 가장 다양한 건물들이 공존하는 곳이 베를린이었다. 아니, 파리나 런던 같은 서유럽의 거대 도시들과 비교해도 훨씬 다양한 모습이 있는 곳일 것 같다. 덕분에 수인이에게도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보여줄 수 있어 보람차기도 했다. 베를린에 오래 머물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취향에 따라 골라 먹는 음식들
독일에 있는 내내 아침과 저녁은 주로 숙소에서 직접 만들어서 먹고 있지만, 점심은 주로 밖에서 사 먹고 있다. 수인이가 첫 번째 낮잠을 자는 시간이 아빠 엄마에게는 휴식 시간이 되는데 그때 주로 점심을 먹곤 한다. 이전 도시들에서도 이런 점심시간이 상당히 만족스러웠지만 거대 도시답게 베를린에서는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다. 확실히 종류도 다양하고 맛도 좋다.
특히 맛있었던 곳이 <Monsieur Vuong>이라는 베트남 요리 전문점이었는데, 흔히 볼 수 없는 퀄리티라 깜짝 놀랐다. 쌀국수도 훌륭했고, 애피타이저로 먹었던 샐러드, 새우 요리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이 만족스러웠다. 독일/오스트리아를 방문하면 가끔씩 가는 이탈리안 체인 <Vapiano>도 훌륭했고, 베를린에서 시작해 이제는 독일 대표 간식거리가 된 Curry Wurst도 두루두루 맛있었다. 베를린의 유명한 케밥인 <Mustafa's Gemuese Kebab>도 가끔 생각날 정도로 맛있었음은 물론.
여행을 다닐 때 자연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연이 훌륭한 곳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대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 이런 다양한 음식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베를린은 완벽했다.
역사의 흔적
베를린은 분단이라는 흔치 않은 역사를 거쳐온 곳이다. 게다가 한 나라도 아니고 한 도시가 두 개로 쪼개져 있었으니 아직도 그런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베를린 장벽의 흔적들을 마주할 수 있고, 설명까지 매우 잘 되어 있어서 글로만 보던 많은 것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베를린 장벽(사실은 철조망)을 뛰어넘는 병사가 나온 그 유명한 사진이 찍힌 곳도 그대로 남아있다.
더 인상적이었던 곳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었다. 학살된 유대인을 기리기 위한 구조물인데 겉으로 보기엔 그저 네모난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 키를 넘을 정도의 돌도 있었다. 안에 들어가면 돌이 사방을 가득 매워 답답한 느낌인데 유대인 학살 피해자들이 느꼈던 그런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부끄러운 과거일 텐데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과연 우리는 이럴 수 있을까.
사실 이런 흔적들은 수인이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큰 기대 없이 몇 번 설명을 해줬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건 묵묵부답. 그래도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지, 아이만을 위한 여행은 아니다. 아빠와 엄마를 위한 이런 요소들도 필요하다. 그저 멋진 건물들, 좋은 공원만 있는 도시보다는 이렇게 격동의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흔적들이 많이 있는 도시가 산책 하기에도 훨씬 재미있음은 물론이다.
역시 티어가르텐!
베를린에 있으면서 수시로 티어가르텐에 갔다. 하루는 포츠담 광장 근처에 있는 높은 빌딩(Panoramapunkt)에 올라가서 전경을 바라보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보는 베를린의 시원한 풍경이 압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티어가르텐이 중앙에 마치 허파처럼 자리하고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들이 줄지어 있으며, 새파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진 모습이 보는 우리 가족 모두를 절로 기분 좋게 만들어줬다. 저렇게 좋은 공원이 중앙에 있는 것은 적어도 나 같은 여행객에게는 정말 축복인 듯!
유람선에서의 인연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날 늦은 오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슈프레 강 유람선을 탔다. 날씨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오후 늦게 되면 추우니까 수인이를 토끼옷으로 꽁꽁 싸매고 유람선에 올랐다. 성인 1인당 만원대의 가격으로 부담 없이 독일 의회, 중앙역 등 베를린의 곳곳을 즐길 수 있어 매력적인 수단이다. 수인이도 좋은지 "응, 응" 소리를 냈다. 바다나 강을 보면 언제나 감탄하는 우리 딸. 수인이가 좋으면 우리도 좋다.
유람선은 왕복으로 돌아오는 코스라 약 1시간가량 걸렸다. 중간에 추워서 잠시 선실에 내려와서 있는데 나이가 지긋한 부부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가 정말 예쁘네요. 어디서 왔어요?"
"아, 저희는 한국에서 왔어요. 딸과 함께 여행 중입니다."
"우리에게도 한국에서 입양한 딸이 있어요. 이름은 뭐예요?"
"와 신기하네요. 수인이에요. 유수인."
"어머, 우리 딸 이름도 수인이에요!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도 있답니다."
이름이 같은 한국 아이를 입양해서 키운 신기한 인연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내리기 전에는 함께 사진도 찍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먼 타국으로 입양해 와서 지금은 잘 큰 그 수인이처럼 우리 수인이도 앞으로 예쁘고 건강하게 커나갔으면 좋겠다.
아이가 클수록 욕심은 점점 적어진다. 그저 큰 탈 없이 잘 크기만 했으면 좋겠다. 독일 여행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기억하거나 이 여행을 계기로 대단한 아이로 크거나 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외국도 다니고 한 만큼 어디서나 잘 적응하는 건강한 아이로 크기만을 바랄 뿐.
베를린 안녕. 아빠 엄마만큼 수인이도 좋았겠지? 비록 알 수는 없지만 그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