쾰른으로 이동
베를린을 떠나며 아침에 아내에게 살짝 짜증을 냈다. 저녁부터 수인이가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지 칭얼대기도 하고, 다음 도시로 떠날 준비도 조금씩 어긋나고 해서 순간 짜증이 오갔고 덕분에 매우 숙연한 분위기로 베를린을 떠났다. 거점 도시를 떠날 때마다 그 숙소에게 안녕을 고할 겸 동영상도 찍고 있는데 베를린 숙소의 동영상은 매우 조용하게 남게 되었다. 금방 풀리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여행이 길어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씩 쌓여있던 것이 밖으로 표출이 된 것 같다. 서로에게 더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본다.
베를린에서 쾰른까지 이동은 역시 기차다. 초고속열차인 ICE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다. 장거리 기차 여행은 여전히 힘들다. 드레스덴에 다녀올 때처럼 빈칸이 있어서 편하게 누워가는 행운은 더 이상 없다. 수인이를 안았다가, 같이 책을 봤다가, 돌아다니다가, 잠시 재웠다가 하는 패턴이 계속 반복됐다. 중간에 수인이가 잠깐 잘 때는 카페에 가서 맥주와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것 덕분에 긴 기차 여행을 견딜 수 있었던 듯싶다. 그런 소소한 즐거움마저 없다면 정말 악몽이었을 텐데. 괜찮은 수준의 커피와 맥주를 괜찮은 수준의 가격으로 제공하는 독일 기차 정말 사랑합니다.
모든 일은 어떻게든 지나가게 마련이다. 오후 3시경에 멀게만 보였던 쾰른에 결국 도착했다. 다행히 쾰른 중앙역에서 숙소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일단 짐부터 빨리 풀자 하고 얼른 예약해둔 숙소로 이동했는데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로비부터 많이 계시고, 엘리베이터는 세상에서 가장 태평하다는 듯이 천천히 움직이고, 알고 보니 실버타운 같은 곳이었다. 일부는 호텔로 운영도 하고, 일부는 실버타운으로 장기 투숙하는 그런 곳.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파티할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아이와 함께 있으면 너무 젊은 감성의 숙소가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
실버타운이라 그런지 숙소는 지금까지 중에 가장 넓었다. 방도 넓고, 거실도 굉장히 넓고, 화장실도 넓고, 주방도 웬만한 건 다 갖춰져 있고. 덕분에 수인이는 묵는 내내 거실과 방 사이를 엄청나게 기어 다녔다. 처음에 독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빠르게 기어 다니지는 못했는데 독일에서 몇 주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더욱 자랐다. 어린아이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어른이 정적인 여행 동반자라면 아이는 굉장히 동적인 여행 동반자다. 만약 한 달이 아니라 3개월, 6개월 이렇게 여행을 한다면 아이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수인이는 참 신기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만큼 더 많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빠의 마음.
첫날은 일단 걸으면서 쾰른을 느껴보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한 코스가 라인강을 넘어서부터 호엔촐레른 다리(Hohenzollernbrücke)를 지나 중앙역 쪽으로 걸어오는 코스다. 처음 걷기 시작한 때가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걸으면서 점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고요한 가운데 다리 위론 걸어 다니는 사람들과 가끔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만 들리고, 왠지 따뜻한 분위기가 됐다. 수인이는 유모차에서 잠이 들었다. 내가 유모차를 밀고, 아내는 옆에서 조용히 걷고 또 걸었다. 자연스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약 20분 동안 우리 가족 모두 분위기에 심취해서 천천히 걸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드라마였다면 그 장면에서 화면을 흑백 처리하고 그 회차를 마무리를 지었을 것 같다. 그러면 최소한 다음 회차까지는 그 순간에 머물러 있을 테니.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 호엔촐레른 다리 위를 저무는 시간과 함께 걸었던 그 순간은 아마 오랫동안 생생하게 기억될 것 같다.
쾰른은 '가펠 쾰쉬'라는 맥주가 유명하다. 독일의 각 지역마다 맥주가 유명하지만 쾰른의 이 맥주는 우리나라에도 수입될 정도의 유명한 맥주라 쾰른에 온 첫날에 현지의 맛을 직접 느껴봤다. 물론 우리 예쁜 딸이 맥주집에서도 책을 보며 잘 있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실내 금연도 잘 지켜지기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특이하게 일반적인 맥주잔보다 훨씬 작은 잔에 맥주를 주고(그만큼 한 잔의 가격도 물론 저렴하다), 웨이터가 돌아다니면서 잔이 빈 곳이 있으면 물어보지 않고 새로운 맥주를 준다. 맥주는 주문할 필요도 없이 그냥 앉으면 무조건 준다. 싫을 때는 거절을 하면 된다. 재미있는 시스템이었다. 맥주 맛은 훌륭했다. 깔끔하고, 시원하고, 고소해서 어디나 잘 어울리는 맑은 맥주 느낌? 독일에서 먹은 수많은 맥주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맛있는 맥주라 만족스러웠다.
인상적인 산책과 맥주로 시작한 쾰른. 첫인상이 좋은 곳이다. 반가워요 쾰른 사람들. 수인이와 우리 가족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