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심초사했던 하루

여행 중에 처음으로 아팠던 날

by 본격감성허세남

자정이 살짝 넘은 시각, 여느 때처럼 잠을 잘 자던 수인이가 갑자기 깨서 울기 시작했다. 자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잠깐 깨서 울기도 하기에 금방 다시 자겠거니 했는데 이번에는 도무지 그치려고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아주 가끔 그러긴 한다. 그럴 경우 아예 안고 잠깐 밖에 나가서 산책을 하거나 차를 태우고 돌아다닌다. 그렇지만 여기는 외국, 이미 자정도 넘은 시각인데 밖에 나가기도 왠지 찝찝해서 최대한 집 안에서 달래 보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일단 나가서 돌아다녀보자 하고 수인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밖으로 나갔다. 외국에서 자정이 넘은 시각에 거리를 걸어 다닌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무래도 관광객의 신분이니 사소한 사고에 휘말려도 난처해질 테니까 주변을 매우 경계하며 여기저기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20~30분 정도를 걸어 다니니 수인이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됐고 해서 숙소로 돌아와서 다시 잠을 재웠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수인이의 컨디션이 걱정이 되었다.


넷째 날 아침에 수인이가 일어나자마자 열이 나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해열제를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살짝 미열이 있었다. 기침은 어제보다 좀 더 심해졌고, 콧물도 살짝 나는 것 같았다. 걱정했던 감기가 더 심해진 상황이었다. 사실 감기가 흔한 질병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행 중에 이러니 덜컥 불안해졌다. 하루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고 급하게 비행기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표는 있었지만 변경하려고 하면 20만 원을 넘게 내야 하는 상황. 저렴한 비행기표가 늘 그렇듯이 사실상 새로 구입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돈이 들었다. 이걸 가지고 아내와 함께 이것저것 논의하다가 일단 예정대로 하루 더 있기로 했다. 아직 심각한 상황도 아니고, 설사 내일 더 심해진다 하더라도 한국에 돌아가서 바로 조치를 취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만 6개월이 지났을 때부터 제주도, 독일, 일본 등 다양한 곳을 함께 다닌 수인이지만 아픈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다 보니 더 긴장이 됐던 것 같다. 그동안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니 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아빠 엄마가 열심히 잘 다닌 덕분에 아이도 함께 잘 다닌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이가 건강한 덕분에 아빠 엄마가 열심히 잘 다닐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고마워 우리 딸. 아빠 엄마가 더 심해지지 않게 조심할게.


사진 2017. 3. 21. 오전 10 43 55.jpg "아빠 엄마, 저 컨디션이 조금 안좋아요."


수인이가 아픈 만큼 오늘은 어딘가로 가지 않고 타이페이 안에서 여유롭게 보내기로 했다. 그럴 땐 역시 공원이다.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피하고 싶어서 국부기념관 옆의 중산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도 집 근처 채식 식당에서 수인이 먹을 밥을 샀다. 공원 가서 천천히 먹일 생각이다. 기온이 낮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우중충한 하늘에 바람도 불어서 혹시 수인이 감기가 더 심해질까봐 담요까지 덮어줬다. 순간순간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상태였다. 확실히 평소보다 활기가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난히 잘 노는 모습을 보니 무리해서 돌아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인이는 어제 만난 돌멩이 친구를 공원에서 또 발견해서 던지면서 놀기도 하고, 밥도 받아먹고, 오늘은 '꽃잎 친구'를 새로 만나기도 하면서 잘 놀았다. 그러다가 금방 피곤해졌는지 유모차로 다가와 앉혀달라는 몸짓을 했다. 그 모습이 괜히 또 안쓰러웠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아빠는 작은 것 하나에도 참 마음이 아프다.


사진 2017. 3. 21. 오후 1 14 48.jpg
사진 2017. 3. 21. 오후 12 59 28.jpg
사진 2017. 3. 21. 오후 1 36 44.jpg


유모차를 끌고 걸으며 타이페이 101 빌딩 근처까지 갔다. 부슬비가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얼른 레인커버를 유모차에 씌우고 좀 더 걷다 보니 수인이는 잠에 들었다. 힘이 조금 없긴 하지만 아프다고 크게 칭얼대지도 않고 증상이 더 심해지지도 않아서 다행이다.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우리도 잠시 쉬었다. 마음 졸이다 보니 크게 한 것도 없는데 괜히 피곤했다.


101 빌딩이 보이는 근처에 작은 부스들이 모여있는 꽤 괜찮은 공간이 있었다. 상설인지는 모르겠다. 정식 건물이 아닌 컨테이너 비슷한 매장들이 모여있는데 각각에서 파는 것들이 좋아 보였다. 우리나라에 몇 년 전부터 핫해진 건대 근처 <커먼 그라운드>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어느 곳에서는 생전 보지도 못한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포키'(빼빼로 비슷한 과자)를 팔고, 어떤 곳에서는 대만/일본 등 다양한 식사류를 팔고, 어떤 곳에서는 디저트를 팔고, 중앙에는 무대가 있어서 공연을 볼 수도 있었다. 물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평일 한낮에 열리는 공연은 없었지만. 잠시 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그리 크게 아픈 것도 아닌데 처음이다 보니 너무 과하게 걱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니 남은 시간만큼은 편하게 보내야겠다.


사진 2017. 3. 21. 오후 2 31 03.jpg 좋은 휴식 장소가 되어준 101 빌딩 근처의 광장


늦은 점심을 다 먹었는데 수인이는 깨지 않았다. 한참 걸어서 망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는데도 수인이는 깨지 않았다. 더 걸어서 커피나 한 잔 하고자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켰는데 역시나 깨지 않았다.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커피가 참 맛있네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제야 수인이는 눈을 떴다. 잠시 정신이 없는 듯 눈을 끔뻑끔뻑 하다가 곁에 아빠 엄마가 있다는 걸 알게 됐는지 금방 안정이 됐다. 2시간 조금 넘게 잤나.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컨디션이 훨씬 좋아 보였다. 열은 더 나지 않았고, 코도 막힌 것 같지 않았다. 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남은 시간은 쇼핑이나 하고 거리나 둘러보고자 지하철을 타고 먼저 타이페이 기차역 쪽으로 향했다. <이지셩 베이커리>에서 누가 크래커도 살 겸, 이전에 기차역 2층에서 만족스럽게 이용했던 채식 레스토랑에서 저녁도 먹을 겸 해서였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동안 수인이는 훨씬 좋아진 모습이었다. 여느 때처럼 둘리를 하며 사람 구경을 했다. 아쉽게도 채식 레스토랑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라 푸드코트에서 수인이만 대충 밥을 먹였지만 수인이가 활기차니까 마음도 편하고 그 외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이렇게 노심초사하고 영향받고 했던 적이 있던가. 솔직히 정말 사랑하는 아내조차 그렇지는 않았는데. 아이란 존재는 이토록 신기하고 놀랍다. 그래서 아빠다.


사진 2017. 3. 21. 오후 4 23 47.jpg
사진 2017. 3. 21. 오후 4 16 52.jpg
사진 2017. 3. 21. 오후 4 49 22.jpg "아빠, 내가 언제 아팠었나요?"


이후에 수인이는 오전과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었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마음껏 뛰어다니고, 심지어 라인 프렌즈 매장 앞에서는 아빠에게 포즈를 취해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타이페이 기차역에서 시먼딩 거리를 거쳐 까르푸까지 갔는데 거기서는 완전히 정상인 아이가 되었다. 꺄르륵 웃고, 카트 안에서 난동을 피우고, 가끔 소리도 질렀다. 어쩔 땐 부끄럽기도 했던 그 모습이 얼마나 반갑던지. 이제야 우리 딸 같았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콩순이 같은 우리 딸, 감기를 잘 이겨내서 참 다행이고 고마웠다.


숙소로 돌아와서 씻은 후 뛰어놀다가 수인이는 조금 늦게 잠에 들었다. 아무래도 낮잠을 많이 자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밤이었지만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다. 오늘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느라 나도 피곤하고 해서 금방 자려다가 한 캔 남은 맥주가 아까워서 혼자 억지로 마시며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옆에서 우리 딸은 새근새근 잘 잤다. 이렇게 잘 놀고 자고 할 거면서 아빠 엄마 마음을 왜 그렇게 들었다 놨다 했니.


일정을 앞당겨서 그냥 돌아갔으면 엄청 아쉬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동안 특별히 무언가를 하거나 새로운 것을 보거나 한 건 없지만 흩날리는 부슬비와 함께 타이페이 시내 여기저기를 그냥 돌아다니는 것도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큰 기대가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오늘 하루의 모습은 서울에 있을 때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훨씬 여유롭고 편안했다. 그래서 놀라웠다. 마치 휴가를 쓰고 늘 어딘가를 가던 내가 처음으로 휴가를 쓰고 집에만 있었던 때에 느꼈던 그런 감정과 비슷했다. 굳이 어딘가를 안 가도 집에서 빈둥대는 휴가도 참으로 즐겁고 좋다는 것이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휴가라면 뭐든 좋다. 게다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면 더욱 좋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나 보다.


비록 종일 노심초사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원래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법이다.


사진 2017. 3. 21. 오후 5 11 48.jpg
사진 2017. 3. 21. 오후 5 12 29.jpg
사진 2017. 3. 21. 오후 6 53 16.jpg 세계 어디든 마트는 언제나 즐겁지!
keyword
이전 17화기암괴석 가득한 이국적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