튈르리 정원의 놀이동산
급할 게 없으니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여유 있게 아침도 먹고, 조금 놀다 보니 원영이가 졸려하길래 방에 들어가서 재워놓고 우리는 천천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완전히 평화로운 아침이었는데 갑자기 위층에서 드릴로 무언가를 박는 소리가 엄청 크게 나더니 곧 원영이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굉장히 크게 울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개복치'라고 부를 정도로 자주 놀라는 아이인데 얼마나 깜짝 놀랐으면 그렇게 크게 울까. 그때부터 엄청나게 서둘러서 빨리 나와야 했다. 우리만의 평화로운 아침이 망가져버렸다. 덕분에 평소보다 조금 더 부지런해졌다. 그래 봤자 오전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지만. 집에서 나온 후 곧바로 향한 곳은 우리가 사랑했던 바로 그 빵집이다. 바게뜨를 사서 먹으며 본격적으로 파리 탐방을 시작했다.
이날도 맑고 쾌청한 날씨. 유럽 여행을 온 뒤로 날씨 운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좋다. 역시 날씨 요정 수인이와 함께라면 어딜 가도 날씨가 예상보다 더 좋다.
충격적인 화재 사건으로 인해 파리의 대표 명소인 노트르담 성당은 주변이 완전히 봉쇄된 채 한참 복구 중이었다. 그 때문에 파리의 큰 볼거리 하나가 사라지긴 했지만, 시테섬에서 시작해서 루브르 박물관까지 이어지는 그 길은 역시나 명불허전으로 멋졌다. 파리의 랜드마크들은 정말 멋지다. 단순히 하나하나가 멋질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모여있는 중심부 쪽의 분위기는 세계 그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멋지다.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아내가,
"노트르담은 공사 중이라 그리 감흥이 없었는데 루브르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지네."
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였다. 파리엔 그런 매력이 있다. 처음에 혼자서 파리에 왔던 게 1월 초, 한겨울이었는데 그 추운 날씨 속에서도 파리의 도심은 낭만적이고 포근해 보였으니까 뭐. 그런 곳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다시 오다니 그것 만으로도 왠지 흐뭇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하기에 파리의 단점이라면 많이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랜드마크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다 보니 걸으면서 느낄 수밖에 없다. 어른이야 상관없지. 하지만 아이, 특히 수인이 정도로 애매한 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처음엔 신기한지 센강도 열심히 구경하고 뛰어다니기도 하더니 금방 인내심이 바닥이 났다.
"엄마 더워요."
"힘들어요. 안아주세요."
"나 유모차 탈래."
이 3종 세트가 우리를 괴롭혔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많이 보던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는 신기했나 보다. 아는 것을 눈으로 보니 더 실감이 났을지도. "루브르 박물관!" 하고 외치더니 혼자서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우리가 가자고 여러 번 외치다가 원영이만 데리고 혼자 떠나야만 그제야 수인이가 따라오곤 했다. 그러다가 루브르 박물관을 나오면 금방 또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우리 딸. 오죽하면 파리 여기저기에 보이던 전동 스쿠터 공유 서비스를 이용해서 수인이를 태우고 다닐까 생각을 했을까. 물론 위험해서 시도해보지는 않았지만.
결국 튈르리 정원에 와서 그늘을 찾아 한참 동안이나 쉬었다. 겨울에 왔을 때는 여기가 상당히 황량했던 기억이 있는데 여름에 오니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싱그럽고 기분 좋은 녹색 천지에,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쉬고 있었고,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하늘이 그 기분을 한층 더 좋게 만들어줬다. 말 그대로 여름의 튈르리 정원은 눈이 부셨다. 이런 곳에서는 많이 쉬어야 한다. 기온은 20도 중반 정도지만 날씨가 워낙 맑아서 햇빛이 뜨겁다 보니 아이들도 더웠는지 시원한 곳에 오니까 표정이 굉장히 밝아졌다. 그래, 이런 날에 걸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생이다 우리 아이들.
중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겠다며 나 혼자 주변을 한참 찾았다. 분명히 구글 지도에는 스타벅스가 있다고 나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프랑스의 웬만한 카페에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팔지 않기 때문에 스타벅스를 가야 하는데 이날만 벌써 두 번째 허탕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안에 스타벅스가 있다고 나올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희한하게 프랑스에서만 이랬다. 스페인에서는 그렇게 정확하게 맞던 구글 지도가 말이지. 이제는 한국인의 소울 음료가 되어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을 수 없다니! 어쩔 수 없이 까르푸 익스프레스에 들러서 인스턴트커피라도 시원한 거 힘들게 사 와서 마셨는데 어찌나 아쉽던지. 인스턴트커피마저 없다. 커피에 관해선 뭐 그리 깐깐한지. 그들의 문화니까 할 말은 없다만.
튈르리 정원에서의 하나 옥에 티라면 이 날따라 심했던 모래 폭풍이었다. 사람들이 걷는 곳은 모래로 되어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들이 뿌옇게 날렸다. 덕분에 하루가 지나니 신발이 완전히 먼지투성이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분명히 도시 속에 있었는데 산에 다녀온 것보다 더 험한 이 느낌은 뭐지. 멋있고 여유롭고 좋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없고 모래폭풍도 심한 옥에 티도 있었던 곳. 마치 우리가 이후에도 느낀 파리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그런 곳이 튈르리 정원이었다.
한참 쉬고 있는데 저 앞으로 큰 대관람차가 보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으로 관람차를 그렇게 재밌게 탔던 수인이가 저걸 지나칠 리가 없다.
"아빠 대관람차! 우리 저거 타러 갈까?"
"그래 가자. 여기 왔으면 저걸 타봐야지."
찾아보니 튈르리 정원 한쪽에 여름에만 잠깐 열리는 놀이공원이었다. 이제는 파리의 연례 이벤트처럼 매년 열리는 모양이었다. 이런 것을 놓칠 수는 없지.
우리 가족 모두 함께 탈 수 있는 대관람차를 먼저 탔다. 파리 도심지 한복판에서 높이 솟아 보는 그 모습은 참 일품이었다. 원영이도 신나는지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쳐다봤다. 한 바퀴만 도는 것도 아니고 여러 바퀴를 돌게 해주기 때문에 더 여유롭게 볼 수 있기도 했다. 멀리 사크레쾨르부터 가까이는 오르셰 미술관과 에펠탑까지, 주요 랜드마크들이 다 보였다. 그래 대관람차는 이 정도 풍경은 보여줘야지! 역시나 한 가지 옥에 티라면 1인당 요금이 12유로나 됐다는 점. 바르셀로나 티비다보 놀이공원에서는 2유로였는데. 무려 6배나 했다. 다른 놀이기구들도 다들 비쌌다. 그럼 그렇지. 파리는 좋다가도 뭔가 하나씩 아쉽다.
기왕에 온 거 돈 걱정은 잊고 수인이가 탈 수 있는 건 마음껏 타게 해 줬다. 수인이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분명히 전까지 힘들다고 안아달라고 하던 애가 이렇게 활발하게 다닐 수 있다니. 역시 랜드마크고 뭐고 아이들은 열심히 뛰어놀아야 즐겁다.
정원 끝부분에 놀이터가 있었다. 꽤 난도가 높아서 수인이가 과연 잘할까 의심이 가는 그런 놀이터였다. 심지어 프랑스 애들도 많이 놀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으면 꺼려하는 수인이 인데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는데 웬걸. 외국 아이들 속에서 열심히 잘 탔다.
"수인아 재밌어?"
"네! 엄청 재밌어 아빠!"
많이 크긴 했다. 그 어떤 랜드마크보다도 아이들이 즐겁게 웃으며 뛰어노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좋다. 여름의 튈르리 정원이 좋았던 건 이렇게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곳이 많기 때문이었다. 겨울엔 꽁꽁 싸매고 다니기 바빴는데. 여름이라는 계절의 매력이기도 하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놀았는지 수인이는 튈르리 정원을 나와서 원영이 유모차를 빼앗아 타더니 곧 잠이 들었다. 원영이도 엄마 품에서 잠이 들었다. 원래 계획은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까지 가는 것이었지만 그 계획은 급 수정되어 샹젤리제 거리 초입에서 끝났다. 늘 그런 식이니 아쉽지는 않더라. 어차피 파리에는 내일도, 내일모레도 있을 거니까. 아쉬움보다는 아이들이 모두 잘 때 아내와 둘이서 먹은 달달한 설탕 크레페와 주변의 평화로운 공원, 그리고 정말 우연히 들어가서 사 먹고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던 라 뒤레 마카롱이 이 마음에 남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해 먹고 다시 나가서 집 근처 공원 산책도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해가 지지 않으니 노는 시간이 길어진다. 날씨 역시 딱 활동하기 좋은 정도. 불과 지난주까지 극성을 부렸다는 폭염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역시 여름의 파리는 여행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비록 옥에 티들이 있긴 하지만.
두 번째 날에 또 느꼈다. 숙소는 정말 좋았다. 에어컨이 없어서 혹시나 살짝 걱정했지만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데 서늘해서 나는 이불을 덮을 정도였으니. 우리 가족 모두 파리에서의 첫날밤과 둘째 날 밤을 매우 잘 잤다. 보면 볼수록 참 마음에 드는 숙소다. 우리 부부에게 남은 파리의 긍정적인 이미지의 8할은 아마 이 숙소 때문이지 아닐까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숙소와 1층의 모노프리 슈퍼만 딱 떼어서 한국으로 가지고 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