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

by 본격감성허세남

바람이 엄청나게 강하게 분다. 파도가 계속해서 몰려온다. 머리는 쉼 없이 흩날리지만 그게 또 상쾌하기도 하고 멍하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좋아서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는다. 마침 하늘도 적당히 흐려서 더 스산한 느낌이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있을 뿐.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는 인위적인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진짜 자연의 소리다. 눈으로 보고 귀로도 듣고 하니까 정말 실감 나면서도 춥다. 조금 변태 같지만 이런 황량한 겨울 바다가 너무나도 좋다.


예전에 친구와 함께 1월에 동해 바다로 자전거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양양의 하조대 해수욕장을 지나며 잠깐 들렀었는데 그 후로 겨울 바다라고 하면 항상 그 바다가 생각났다. 구름 한 점 없으면서 겨울 특유의 차가운 하늘, 그 아래 동해바다의 진한 파란색 바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로 바람이 잘 다듬어놔서 깨끗하고 하얀 모래, 이 세 가지가 조화롭게 펼쳐졌던 그 겨울 바다는 눈부시면서 동시에 가슴이 시리게 아름다웠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정말 가슴이 시렸다. 왠지 손 대면 깨질 것 같은 그런 연약한 모습이기도 했다. 오늘 같은 겨울 바다가 나를 압도하면서 내가 그 안으로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라면, 하조대의 겨울 바다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이 보기만 해야 할 것 같은 처연한 느낌이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지만 그 두 모습 모두 겨울 같아서 좋다. 역시 바다 중 최고는 겨울 바다다.


겨울 이외의 바다는 너무 붐빈다. 특히 여름은 절정이다. 사람들 때문에 바다가 설 자리가 없다. 거대한 바다를 온전히 느끼려면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겨울 바다가 더 좋다. 누군가는 바다에 들어가서 즐기는 걸 좋아하지만 나에게 바다는 바라봐야만 하는 경외감이 드는 존재다. 겨울엔 그런 느낌이 최고조에 달한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에서 주인공들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쓰러져서 죽는다. 그때 바다 역시 사람이 없는 황량한 겨울 바다였다. 여름의 붐비는 바다로 갔다면 이상했을 거잖아. 그 배경으로 락 발라드 느낌의 영화의 주제 음악이 깔렸다면 더 이상했을 거잖아. 대책 없이 신나야만 할 것 같은 여름 바다는 나같이 삐딱한 사람에겐 왠지 거부감이 든다. 역시 백미는 겨울 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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