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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예 Feb 26. 2021

남미에서 생긴 일 11. 위험한 도시 안전하게 구경하기

[볼리비아, 라파즈]

새벽 6시가 넘어 라파즈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버스는, 4시 반에 갑자기 정차하더니 곤히 잠든 모두를 깨웠다. 세상에, 급히 GPS를 확인해보니 라파즈 터미널에 도착해 있는 게 아닌가. 연착되는 경우는 봤어도 1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하는 건 또 무슨 경우인지.


라파즈는 볼리비아의 행정수도인 만큼 꽤나 위험하기로 악명도 높았고 우유니에서 만난 한국인 동행들이 터미널 근처가 무섭다고 이미 잔뜩 겁을 준 후였다. 해도 뜨지 않았는데 터미널을 어슬렁어슬렁 나설 순 없었다. 결국 덜덜 떨다가 터미널 한가운데 의자에 처량하게 쪼그려 앉아 뜬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일출만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 와중에 간간히 잡히는 와이파이에 연결해 이곳의 호스트 돌트리에게 미리 사정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새벽에 도착한 버스터미널에서 처량하게 찍은 눈물의 셀카


어느덧 새벽 7시,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시간, 돌트리에게 답장이 왔다. 아직 집으로 오기엔 좀 이른 시간이니, 라파즈의 명물인 케이블카를 타는 걸 추천하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아침 일찍 케이블카를? 배낭도 무거운데 이걸 들고 다니라는 말인가? 미심쩍어하는 나에게 그는 재차 설득했다. 이 케이블카는 라파즈에서 지하철 대신 설치한 대중교통으로, 딱히 목적지가 없어도 위에서 도시 전경을 다 볼 수 있으니 굉장한 경험일 거라고, 배낭은 탑승 후 내려놓고 오랫동안 구경해도 되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나는 반신반의하며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레 터미널을 나섰다. 지도를 보며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길가 작은 공원에 모여 앉은 노숙자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보였다. 아, 우유니 동행들이 조심하라고 말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속으로 되새기며 애써 앞만 보고 걸었다. 세계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수도답게 숨이 금방 찼다. 무거운 배낭이 돌덩이처럼 느껴질 즈음, 눈앞에 라파즈의 케이블카 텔레페리코(Teleferico)가 크게 적힌 역이 나타났다.


케이블카가 노선마다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다


텔레페리코는 마치 지하철처럼 색깔별로 노선이 구분되어서 각 노선별로 운행하는 케이블카에도 그 색깔이 예쁘게 입혀져 있다. 돌트리는 특히 빨간 노선과 파란 노선을 꼭 타보라고 추천했다. 내가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엘 알토의 세계 최대 규모 일요시장을 위에서 볼 수 있을 거라는 꿀팁까지 주면서. 이 시장은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케이블카에서 보는 것이 더 괜찮을 터였다. 3볼리비아노(약 475원)를 지불하고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케이블카로 발을 내디딘 순간, 배낭에서 해방된 내 가련한 어깨에 쾌감을 느끼며 나는 유리벽에 접착된 듯 달라붙어 버렸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움직이는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는 붉은색으로 물든 도시 전경은, 돌트리의 말을 조금이나마 의심했던 과거의 나를 크게 꾸짖어주고 싶을 정도로 감탄스러웠다. 시내부터 빈민가까지, 또 끝없이 펼쳐진 일요시장까지, 편히 앉아서 구석구석 볼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텔레페리코는 약하게나마 와이파이도 전부 설치되어 있어서, 나는 바깥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느라, 또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이 리얼한 순간의 감정을 담아 호들갑을 떨어대느라 쉴 틈 없이 시간을 보냈다.


미니버스가 온 거리를 빽빽하게 채울 정도로 도로 상황이 복잡한 라파즈는 지하철 건설이 여의치 않자 고민 끝에 케이블카를 설치했다고 한다. 지하 대신 공중이라니, 사실상 교통체증이 전혀 없는, 너무나도 예쁘고 현명한 대중교통수단이 아닌가!


케이블카로 보는 전경, 오른쪽이 일요 시장


구경을 마친 후 초록 노선으로 갈아타고 돌트리의 집으로 향했다. Irpawi 역에서 내린 후 그가 신신당부한 대로 안전을 위해 일반 택시 말고 radiotaxi를 타자 12볼리비아노(약 1900원)에 그의 집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돌트리는 강아지 키아라를 데리고 나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고 있는 그는 업무 시간 조절이 자유로워서 오후에 라파즈의 유명한 킬리킬리 전망대로 나를 선뜻 태워다 주었고, 비건인 그가 시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데려가 주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퀴노아로 만든 비건 파이와 아보카도, 페퍼민트로 만든 비건 아이스크림이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이건 내가 대접할 수 있게 해 줄래? (Please let me invite you for this one)”라는 그의 정중한 말에 감동은 두 배로. 


전망대 뷰와 돌트리가 사준 비건 음식들


이튿날 오전, 돌트리의 부탁대로 키아라에게 아침 산책을 시켜주고 온 나는 이번엔 홀로 나섰다. 이번엔 현지인처럼 미니버스를 타고 달의 계곡과 마녀 시장에 가볼 생각이었다. 그가 일러준 대로 정류장(이라고 쓰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읽는다)에 가서 미니버스를 타고 구글맵만 뚫어져라 보다가 대충 목적지 근처에 도착한 것 같으면 “빠라다 뽀르파보르(멈춰주세요)”를 외치는 것까진 나름대로 수월했다. 맨 뒷자리 구석에 앉아 끙끙대는 외국인이 불쌍했는지 현지인들이 도와주기도 했으니까. 드넓은 달의 계곡을 홀로 걸어 다니며 고독을 씹는 것까지도 괜찮았다. 미로 같은 마녀 시장에서 저린 다리를 이끌고 헤매는 것까지도 괜찮았다. 진짜 문제는 시내에서 집까지 가는 것.


달의 계곡
마녀 시장


라파즈 시내의 메인 미니버스 정류장은 그야말로 대혼돈이었다. 4차선은 되는 것 같은 도로에 수십 대의 미니버스 봉고차들이 쉴 새 없이 정차하고 출발하는데 각 차마다 지역명이 서너 개씩 붙어 있고 그걸 인도에서 애써 하나하나 읽어보며 내가 탈 차를 찾아내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찾는다 해도 봉고차 무리 사이사이로 지나가 무사히 탑승하는 것도 문제였다. 나는 Meseta de Achumani행 340번 미니버스를 타야 했는데, 이 버스는 왜 도무지 오질 않는지. 혹시나 해서 다른 Achumani가 적힌 차로 다가가 물어보면 또 이 차는 아니란다. 이러다 택시를 타야 하나, 이십여 분을 발만 동동 구르다 교통정리를 하는 듯한 여경에게 다가가 번역기를 동원하여 질문을 했다. 그녀는 도로를 유심히 살피더니 미니버스 스케줄을 보여주는 듯한 앱을 켰다. 340번은 분명 여기로 오게 되어 있었는데 그녀 역시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던 중, 문득 멀리서 봉고차 한 대가 340번을 자랑스레 달고 다가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함성을 지르며 그녀에게 저 차가 맞는지 재차 확인한 다음 날아가듯 달려가 미니버스에 올랐다. 내가 제대로 탔는지 끝까지 확인해주던 그녀는 차가 출발하자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게 전부 다 미니버스...


다음 날은 오전 7시에 코파카바나로 출발하는 버스를 시내에서 타기 위해 케이블카 첫차를 잡기로 했다. 새벽 6시에 맞춰 역에 도착 후, 이제 막 운행을 시작하는 텅 빈 케이블카에 나 홀로 오르는 기분이란. 케이블카가 산맥을 넘어 시내로 향함과 동시에 서서히 해가 떠올라 푸른 새벽빛을 비추었다. 점점 환해지는 도시 전경에 나는 어김없이 탄성을 뱉으며 이 잊지 못할 장면을 눈에 담았다. 아무도 없이 나 홀로 탄 케이블카에서 독차지한 라파즈의 마지막 모습을.


아침 일찍 콜택시 부르라고 돌트리가 적어준 안내 쪽지, 그리고 텔레페리코 첫 차 안에서 본 새벽의 라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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