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힘들어서 유산된거 아닐까?

전 프로 거짓말쟁이 입니다만,<5>

by 유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연말이 정말 박 터지게 바쁘다. 공공기관을 상대로 하다 보니 그들의 연말 예산 집행의 시기에 덩달아 우리의 일도 많아지는 것이다.

일이 바쁘면 체력적인 고생을 넘어서 정신적으로도 매우 빈곤해진다. 하루 종일 밀려들어오는 전화와 씨름하고 담당 업무까지 처리하다 보면 나는 이 세상 사람임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형상일뿐이며 내가 실존하는 세계는 따로 있을 것이라며 현재의 현실 감각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회사의 전화기는 쉬지 않고 울었다. 또다시 벨이 울렸고, 우리 회사 블랙리스트 중 하나인 한 여자 공무원의 전화가 왔다. 발신번호에 그 여자의 번호가 떴을 때 도망치고 싶었지만 나는 기계처럼 수화기를 집었다. 금요일 퇴근을 2분 남긴 시간이었다.

"견적서 보내주세요. 저 퇴근해야 되니까 서두르시고요."


그 여자의 짜증섞인 목소리에 일차 빡침이 올라왔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난 이 구역 최대의 욕쟁이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친절한 직원인 나는 화를 억누르며 "네. 서두를게요"라고 전화를 끊었다. 견적 비용을 둘러싸고 몇 차례 실랑이를 하면서 이미 퇴근 시간은 30분 이상 지나있었고 최종으로 알아본 견적을 들고 전화했을 때 이미 그 여자는 퇴근 후 였다. 물어 물어 그녀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하니 그녀는 금요일 퇴근을 맞이한 상쾌한 직장인의 목소리로 말했다.

"급한거 아니니까 월요일날 통화하시게요~"


...씨부엉. 당장 그 여자를 찾아가 얼굴 정중앙을 한대 퍽 쳐버리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영화 <분노의 질주> 속 광폭하는 자동차마냥 온몸을 흐르는 혈관 속 피가 세차게 끓고 있음을 느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끼를 들고 두 여인의 두개골을 내리치던 그 심정, 딱 그 심정!


2021-06-11 10;15;04.JPG 노파의 두개골을 향해 가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도끼! (출처:http://www.pckworld.com)






나는 그 해의 연말에도 어김없이 지쳐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머리가 지끈거렸고 출근하면 더 아팠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임신 후 유산이 된 것도 이맘때쯤이었고, 두 번째 임신 후 유산이 된 것도 이맘때쯤이었다. 이건 우연일까? 나의 엄마 영은 "네가 원래 몸이 약해서 그런 거야. 직장 다니면서 스트레스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라며 일과 유산의 상관성을 부인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원인을 스트레스에서 찾기 시작했다. 쉬고 싶었다.


남편 바리와 나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내가 일을 쉴 때 우리 가계에 미칠 파장이 어느 정도 될지. 실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파장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한 명이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에 생활 많은 부분에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일로 인한 과다한 스트레스와 더불어 유산으로 인한 공허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자포자기의 상태였고, 그런 나를 보는 바리는 일단 일을 쉬자며 날 설득했다.


나는 퇴근 전 회사 대표에게 할 말이 있다며 다른 방으로 그를 불러냈다.

"대표님 제가 최근에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연말에 일이 많아서 몸이 좀 힘들었나 봐요. 거기에 유산도 하면서 몸이 더 상한 것 같아요. 일을 좀 쉬고 싶은데요."

최대한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구구절절 몸과 정신 상태를 피력했다. 자뭇 심각한 내 표정을 바라보던 마음 좋은 회사 대표는 최상의 방법을 제시했다. 당분간 재택근무를 하라고 말이다.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시간적 여유도 생겼다. 남편과 나는 기존에 다니던 산부인과의 추천을 받아 지역의 한 난임센터를 찾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아이를 준비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우리에게 자식이란 없다는 절박함으로.

아이 생각이라곤 1도 없던 내가 이제는 아이를 갖기 위해 난임센터를 방문하다니.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맙소사. 상상도 되지 않는다.


난임센터로 향하기 전, 바리가 말했다. 앞으로 살면서 '절대'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말자고.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과거의 나와 절대 아이를 낳지않겠다는 과거의 나는 남편의 말에 조용하지만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인생 모르는 일이잖아. 앞으로 절대 그 단어 함부로 쓰지말자.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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