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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sleeper Jun 11. 2019

오늘의 옷 : 색이 바랜 플란넬 셔츠

버리지 못한 옷.

일러스트 by @napping_chronicler


오늘의 당신.

버리지 못한 옷.


옷장을 정리하며 잘 입지 않는 옷을 내다 놓으려고 가지고 나갔다가 그대로 다시 들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버리려고 보니 추억도 묻어있고 그 순간 어쩐지 다시 잘 입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옷은 다음 옷장 정리에 또 한 번 레이더에 걸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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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딱 한번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 적이 있다. 차마 버리지 못해 가져왔다가 다시 방치하게 되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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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나처럼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가방에는 언제나 딱지처럼 접은 과자봉지, 영수증, 비닐들이 동네 술집의 조용한 단골처럼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항상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민트를 꺼내 나눠먹으면 혼자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가 재채기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 사람이 속시원히 떨쳐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뿐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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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은 더위가 시작되기 전부터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되기 전까지, 다시 시작한 만남은 추위가 시작되고부터 딱 봄이 올 무렵까지였다. 아무래도 우리의 관계는 좋은 계절과는 인연이 없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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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면 옷도 바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계절이 바뀌어도 입을 수 있는 옷이 있고, 겨울에도 얇은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기도 한다. 한순간 유행이 되었다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쏙 사라지는 옷도 있으며, 세월이 돌고 돌아 다시 유행을 타는 패션도 이따금 나타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계절은 아무래도 잘못이 없겠다 싶었다. 반대로, 계절이 돌아와도 여전히 손길이 닿지 않는 옷도 있을 테니까. 탓을 돌릴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자 어쩐지 조금 더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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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증 저장 강박의 인과관계는 엉터리에, 역순행적이며, 심지어 자의적인 구석이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뒤로 측은지심이 생겨 물건을 더욱더 버리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옷장의 옷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안다.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무언가 정리했다는 건 얼마나 큰 용기를 냈던 건지. 얼마나 숙고했으며, 또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렇게 늦장을 부리던 마지막 말은 하릴없이 이제야 허공에 번졌다. 혹시 버리지 못한 마음의 짐이 남아있다면 재채기처럼 시원하게 털어내길 진심으로 바랐다.


일러스트 by @napping_chronicler


오늘의 옷.

색이 바랜 플란넬 셔츠.


길을 걷다가 그날의 완벽한 코디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으로 방점을 찍은 듯한 사람을 보게 되면 옷장 속 빛바랜 옷에게 기회를 준 그 따뜻한 마음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나 또한 그런 따스함을 알아봐 주는 이 한 명쯤 있다고 믿고 싶어 이따금 새로 산 창창한 청바지에 몇 해를 함께 해 색이 바랠 대로 바랜 낡은 플란넬 셔츠를 걸쳐 입고 구수하게 길을 나서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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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꽃샘추위마저 다 물러간 마당에 왜 하필 플란넬 셔츠냐고 물었다. 플란넬의 촘촘한 짜임과 보드라운 보풀은 따스하고 넉넉한 마음이라고 답하려다 말을 줄이고 그냥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그렇게라도 이제는 비워진 누군가의 옷장 속에 포근함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을 이어나갈 자신이 없어서.




오늘의 당신은 어떤 기분인가요? 나로 대변되는 우리의 일상에서 당신의 기분을 헤아려봅니다. 여러분의 지나간 사연이 누군가에겐 현재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밥을, 옷을, 공간을, 곡을 때로는 한숨을 가지고 당신의 글을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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