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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sleeper May 08. 2019

오늘의 장소 : 명동의 그 중국집

이름 없는 색.

일러스트 by @napping_chronicler


오늘의 당신.

이름 없는 색.


세상엔 무수히 많은 색이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2019년 팬톤 올해의 컬러 ‘리빙 코랄’, 2018년 ‘울트라 바이올렛’, 2017년 ‘그리너리’, 2016년 ‘로즈 쿼츠&세레니티’. 운이 좋으면 기사 작위처럼 이름을 수여받는 색도 있지만 공식적인 이름을 받지 못한 색이 훨씬 더 많다. 만약 다음 생에 한 가지 색상으로 태어난다면 공식적인 이름을 얻지 못해도 아쉬워하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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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은 얻었지만 여기저기에 끌려다 불리는 흔한 이름이 되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 초록색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여름철 뜨거운 햇빛 아래 살랑거리는 느티나무의 녹색을 떠올리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앰뷸런스에 새겨진 십자가의 녹색을 떠올린다. 반대로 공식적인 이름이 없다고 해서 불려질 호칭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공식 명칭이 없기에 귀엽고 사연 있는 별칭을 다양하게 누릴 기회를 얻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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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같은 색을 보고 다른 이름을 붙여주는걸 조용히 몰래 엿듣기를 좋아한다. 이 별난 취미의 묘미는 관찰의 대상이 폭넓은 세대를 아우른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설명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부족한 어휘력을 빌어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색을 묘사하고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에 있어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상상력이 풍부하고 어떤 경험을 했는가에 따라 매우 주관적이고 다양한 이야기가 함축된다는 것. 카마인(Carmine) 색을 두고 어떤 소녀는 첫사랑과 키스할 때 발랐던 스트로베리향 립글로스 색이라고 명명하기도 하고, 90년대 미국 프로 농구를 즐겨보던 배불뚝이 아저씨는 마이클 조던의 땀에 젖은 시카고 불스 유니폼 색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식탐이 많은 동네 꼬맹이는 한번 열면 멈출 수 없는 프링글스 오리지널의 색이라고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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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닐 수 있다. 관계 속에서 어떤 사연을 갖고 어떤 추억을 공유했는지, 그 경험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그런 이야기들이 훨씬 더 정겹고 가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것은 이름이라는 고농도로 함축시킨 한 단어만이 아니라 ‘색’이 될 수도, ‘냄새’가 될 수도, ‘온도’와 ‘촉감’, ‘습도’ 따위가 될 수도 있다.

일러스트 by @napping_chronicler


오늘의 장소.

명동의 그 중국집.


새로운 곳을 찾아내는 것도 좋지만 요즘은 한결같은 가게를 다시 찾아가는 것이 더 좋다. 갖은 풍파 속에서도 오래도록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가게들은 더욱더. 좋았던 기억에 다시 찾아가 봤지만 어느새 사라져 버린 가게들은 어쩐지 알 수 없는 배신감까지 느껴진다. 2007년쯤으로 기억한다. 몇 년째 가고 있지만 이름도 모르고 위치는 남에게 설명도 못해주는 그런 요상한 가게를 찾은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그것도 길을 잃은 명동 한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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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사관 근처 옹기종기 모여있는 중국집 골목, 모퉁이에서 두 번째 가게. 막역한 친구들은 '명동의 그 중국집'이라 말하면 다 알아서 그곳으로 모였다. 늘 요리 하나에 면까지 먹고 싶어 시간이 맞는 3~4명을 불러 모았다. 처음 먹었던 그때 그 맛이 지금은 가물가물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주인이 바뀌어서 예전 같지 않다고도 하지만 왜곡된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올라가기는 싫은 복층식 구조 때문인지 내 머릿속에선 아직도 한결같기만 하다. 다만 달라진 건, 이제 면보다는 볶음밥이 더 좋다는 것 그리고 추억을 이어갈 새로운 멤버가 조금 더 늘었다는 것.

 



오늘의 당신은 어떤 기분인가요? 나로 대변되는 우리의 일상에서 당신의 기분을 헤아려봅니다. 여러분의 지나간 사연이 누군가에겐 현재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밥을, 옷을, 공간을, 곡을 때로는 한숨을 가지고 당신의 글을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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