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의 축복.
오후 4시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여유다. 회사원에게 오후 4시는 칼퇴를 한두 시간 앞둔 절체절명의 순간. 학생들에게는 흥이라는 것이 폭발하는 하굣길이거나 학원이라는 또 다른 단두대로 향하는 묵직한 발걸음. 그와 정반대로 누군가에겐 따사로운 햇빛에 지친 강아지들이 얌전하게 누워 늘어지게 하품하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이 순간이, 그야말로 깨어있는 시간의 정 가운데에서 맞이하는 하루의 골든타임. 그래서 이 찰나를 다른 곳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온전하게 누리는 일은 소수만 아는 일종의 축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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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오후의 마트는 계산대 줄도 짧고 여러모로 번잡스러운 기색이 없어 즐겨 찾게 된다. 한산한 시간대이기에 손님을 끌기 위해 세일을 하기도 하고, 코너마다 시식할 수 있는 음식들이 접시 위에 가득 담겨있다. 게다가 경쟁 상대도 많지 않다. 시골 장날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정육코너의 삼겹살을 두 개씩 집어먹어도 웃으며 더 먹으라고 하는 인심이 제법 정겹다. 이렇게 먹고 나면 장바구니에 담지 않을 수 없다. 가족들에게 판촉을 당한 거라고 핀잔을 들을 때도 많지만 판촉을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대화 몇 마디에 정겨움을 주고받았으니 어느 순간 눈치챈다 하더라도 기꺼이 덮어놓고 속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보통 팩으로 포장된 쪽보다는 그때그때 무게를 달아서 판매하는 쪽을 공략하곤 하는데, 무게를 달고 나서 조금 더 담아주는 덤이 식탁 위에서 반찬으로 향하는 젓가락 횟수에 은근히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오후 4시의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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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즈음 마트에선 할머니들을 유독 자주 마주친다. 아무래도 여유를 가장 잘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젊은 사람이 무가 단단한지 눌러보거나 매대에 나와있는 단호박 중에서 가장 묵직한 놈을 고르기 위해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습이 신기한지 종종 말을 걸곤 한다. 굳이 대화를 하진 않더라도 기웃거린 상품을 똑같이 집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땐 마트에서 고용한 바람잡이라도 된 기분이 들어 왠지 모를 뿌듯함에 어깨가 으쓱해질 때도 있다. 어르신들과 제철 재료를 이야기할 때는 언제든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즐겁다. 그렇게 잠시 떠들고 있어도 길을 막고 있는 건 아닌지 눈치를 보거나 다른 이들의 카트에 떠밀리는 일이 없어서 좋다. 지금이 아니면 내년에나 먹을 수 있다며 이게 이번 생에서 먹는 마지막 참나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제철 나물을 즐겨 드시는 할머니가 생각나 눈시울이 주책없이 붉어진 적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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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가 가장 극적인 시기는 단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변곡점. 이 시기, 이 순간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햇살 덕분이다. 짧은 순간, 깊숙이 떨어지는 햇빛은 만물에 색감과 깊이를 더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장면이 옐로 톤의 표현이 좋은 Kodak ProImage 100 필름으로 촬영한 사진의 구수함 같은 것이 묻어난다. 이런 구수함은 대게 나른함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전구색 조명 아래에서 유난히 하품이 많이 나오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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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장면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끼려면 역시 산책이 답이다. 이 시간만 되면 골프연습장에 구름이 걸려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머리로는 그만큼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기 때문이겠지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구름도 기웃기웃 속도를 늦추다가 덜컥 그물에 걸린 거라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혼자 웃는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도무지 자연적인 느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초록색 그물 위에 풍성하게 널어진 솜이불이 따사로운 햇빛에 바짝 말라 유난히 뽀송뽀송해 보이는 날도 있다. 같은 거리 위에 이 모습을 함께 키득거릴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몇 시간 뒤 치열한 삶에서 퇴근했다는 친구들에게 무심히 보내주겠노라고 열심히 사진으로 담아본다. 역시, 게으름을 한가득 싣고 떠나는 오후 4시의 산책은 절대 손해보지 않을 일. 마침 날씨도 최적의 타이밍이니 더할 나위가 없다. Kings of convenience와 Jack Johnson의 앨범과 함께라면 걸음이 빨라질 걱정일랑은 손에 꼭 쥐어 호주머니에 쏙 찔러 넣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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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 없이 걷다가 공원에 다다를 쯤엔 4시 44분에 시계를 보면 누군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거라던 따뜻한 말을 해준 이를 불현듯 떠올리며 시계를 힐끔거린다.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어요’보다는 ‘내 생각해줘서 고마워요’에 가까웠던 이 말이 훨씬 더 담백하고 의미 있었다. 바쁜 업무 속에서도 잠시 시간을 내 떠올려 줬다는 게 참 고마웠다. 그이는 오후 4시의 가치를 진즉에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니 4시 44분, 아니 그보다는 유여하게 시계의 짧은바늘이 4와 5 사이에 있을 때 짧게라도 문장을 지어 보내는 이는 손이 부지런하다기보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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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근하기만 했던 하늘이 차갑게 돌아서는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다. 귀뚜라미 소리가 이어폰의 멜로디를 대신하는 인적 드문 산책길은 여유보단 한적함에 가깝고, 퇴근길 대로변에선 꽉 막힌 차들의 전조등을 차갑게 마주해야만 한다. 아마도 마트는 북적이는 사람들과 계산대의 부산하고 무미건조한 ‘삑’ 소리로 가득할 것이다. 오후 4시가 비슷한 모습으로 내일 다시 돌아올 걸 알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비슷한 하루를 보낸다 하더라도 지난날과 똑같을 수는 없을뿐더러 온갖 자연 발생적인 행복한 순간의 탄생과 그걸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철저히 목적의식적인 행위는 별개의 문제니까. 누릴 수 있는 이에게는 한없이 느긋하지만 누리지 못하는 이에게는 가장 빨리 스쳐 지나가는 순간, 하늘에 비칠 듯 말 듯 어스름한 달빛 아래 이렇게 모두 저마다 오후 4시의 일시성을 갱신한다. 딱 오늘 하루치만큼만, 자신이 선택한 방향으로.
영화 ‘코다크롬’을 처음 만난 건 헬싱키로 향하는 비행기에서였다. 되짚어 조금 더 정확하게 기억을 떠올리자면 인천에서 헬싱키로 향하는 경로, 몽골과 러시아 사이 상공 어디쯤. 기내식 메뉴라면 모를까 보통 비행기를 타면 비행시간이나 항로 같은 것에는 무심함에도 유독 이 순간만은 생생하게 기억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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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크롬 특유의 개성 있는 색감에 멍하니 빠져들 때쯤, 반쯤 내린 기내 창문으로 절묘하게도 구릿빛으로 물든 하늘과 구름이 영화와 비슷한 색감으로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터져 나오는 하품과 햇빛으로 예상컨대 비행기 위치의 시간대를 기준으로 오후 4시쯤이겠구나 싶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 벤자민 애셔 라이더(에드 헤리스 분)가 아들 맷 라이더(제이슨 서데스키 분)가 운전하는 오픈카를 타고 이동하면서 카메라로 연신 주변을 찍어대는 장면과 비행기에 몸을 담은 당시 상황이 오후의 몽롱한 햇살 속에 위화감 없이 오버랩되었다. 목적지로 향해 가는 여정도 왠지 모르게 한 편의 로드무비에 들어간 듯 오묘한 기분이 들어 평소보다 마음이 몇 배는 더 설레어왔다. 몽골 대륙 상공에서 오후의 4시의 햇살을 만끽하는 상황은 빈번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니 찰나를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어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집중해 머릿속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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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진 서두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코다크롬은 다 큰 어른을 위한 로드무비라 말하고 싶다. 굳이 ‘어른’ 앞에 ‘다 큰’이라는 사족을 단 이유는 시간의 유한함을 공감하려면 세월의 연륜이 어느 정도 쌓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플롯만 놓고 보면 예상 가능한 결말과 단조로운 시나리오라는 꽤나 섭섭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곱씹어 천천히 뜯어보면 하이데거의 시간성을 이렇게 쉽게 담아낸 매체가 또 있을까 싶다. 삶의 끝을 의미하는 벤자민 애셔 라이더(에드 해리스 분)의 병, 공간과 사물의 소멸을 상징하는 코다크롬 필름의 마지막 현상소와 색소의 단종, 여기에 아들 맷 라이더(제이슨 서데스키 분)의 자아실현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었던 직업의 상실까지 인간 염려의 기저가 되는 유한성을 들이밀며 영화는 시작된다. 시작부터 그야말로 ‘끝을 알고 끝을 향해 다가가는 여정’이다. 언어능력과 더불어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하는 중요한 조건, 죽음(소멸)의 가능성. 필름의 단종 소식을 슬퍼하는 건 필름을 품었던 카메라도, 필름에 담겼던 자연과 동물도 아닌 오직 인간뿐이니, 이러한 시간의 지표인 유한성을 한계가 아닌 가능성으로 이해하고 이를 기초로 염려의 근본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정의 중간중간, 두 부자가 일상의 염려와 소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갈등을 빚으면서도 다가오는 죽음(누군가에겐 소멸 또는 상실) 앞에 끝끝내 양심으로 기억되는 마지막 필름 속 과거의 표상을 떠올리며 각자 변증법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현재의 행동을 수행해 나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충만의 순간을 가지는 시원적 시간성을 상기시키는 이도 적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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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의 산책도, 설렘 가득한 여행도, 길게 보면 인생도 마찬가지. 아름다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유한함을 알기에 그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오늘이 가는 게 아쉬워 밤새도록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연인들의 마음까지 적어놓기엔 글이 너무 진부해지려나.
오늘의 당신은 어떤 기분인가요? 나로 대변되는 우리의 일상에서 당신의 기분을 헤아려봅니다. 여러분의 지나간 사연이 누군가에겐 현재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밥을, 옷을, 공간을, 곡을 때로는 한숨을 가지고 당신의 글을 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