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신호.
걸음걸이 때문이었다. 발목 복숭아뼈 근처가 며칠째 뻐근해 찾아간 정형외과에서는 이름조차 생소한 종비 인대(Calcaneofibular ligament) 손상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담당의는 가방을 한쪽 어깨로만 멘다던지, 다리의 다른 부분이 불편해 갑작스럽게 걸음걸이가 바뀌었다던지 하는 아주 사소한 일도 이 불쾌한 통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늘 백팩만 가지고 다녔기에 범인은 그렇게 한쪽으로 좁혀지는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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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이 아프기 며칠 전, 돌발성 난청이 찾아왔었다. 한쪽 귀가 멍멍해서 처음에는 귀에 물이 들어간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 돌이켜 생각해보니 걸음에 문제가 생긴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청각의 불균형이 첫걸음마를 떼고 난 후 몇십 년 간 의식하지 않았던 걸음걸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게 어쩐지 믿을 수 없이 생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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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몸은 부산하게 여러 가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균형을 되찾으라고. 한때 해독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암호 ‘에니그마’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시시한 몸의 신호를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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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때로는 신체적 균형뿐만 아니라 감정과 이성, 윤리와 논리,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할 때가 있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정신적 균형에 비하면 신체적 불균형을 포착하는 일은 오히려 수월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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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주인공 앨런 튜링과 그의 팀은 매 순간 3명이 죽는 사상 최악의 위기에 처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승리에 중요한 열쇠가 되는 암호 ‘에니그마’ 해독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군이 에니그마의 암호가 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암호를 바꾸게 될 것을 우려하여 의심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을 계산했고, 매일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결정하며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다. 그들의 치밀한 통계적 판단은 연합군의 승리로 이어져 1400만 명의 목숨을 살렸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피로 물든 미분’은 정선되지 못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다른 소수의 목숨을 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정의의 여신 디케에게 묻고 싶다. 수학적 계산으로 다른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일은 도대체 어떤 잣대로 저울의 균형을 맞춰야 올바른 판단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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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이었을까요? 아니요, 신이 전쟁을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긴 것입니다. 그럼 나는 뭐죠? 기계입니까? 인간입니까? 전쟁영웅입니까? 범죄자입니까?” 그가 소련의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했던 형사에게 되묻는 앨런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게으르고 미루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살면서 이런 중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를 겪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얼렁뚱땅 너스레를 떨며 피했을 나지만, 어렵게 포착한 몸의 신호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 한차례 불균형을 겪고 난 머리는 스스로 모든 도주로를 차단하고 잠시 편찮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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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그리고 정신적 측면을 막론하고 균형을 잃게 되면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한걸음 한걸음 제대로 딛여낼 수 없게 된다. 짧다면 짧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 불균형은 불편함을 넘어 고통이 되기도 했고 익숙했던 것조차 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목표하던 바를 잠시 멈추고 어쩔 도리 없이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이 아쉬워 불균형의 원인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다시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곤 했는데, 그 덕에 몇 가지 근사한 요령을 체득했다. 이번 경우도 꼭 그랬다. 정형외과의 친절한 재활치료사는 몸의 불균형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부위만 교정을 할 게 아니라 전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체 전반 운동을 통해 특정 부위의 불균형감을 해소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일러주었다. 종비 인대 손상은 적절한 휴식과 안정으로 청력을 회복한 뒤, 전신 도수치료를 포함한 여러 가지 신체 전반의 재활 치료를 통해 무사히 회복되었다. 정신적 불균형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균형 있는 가치 판단은 폭넓은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치우쳐지지 않은 주관과 생각의 깊이를 전제로 한다. 이를 통해 불편함, 거북함, 공평하지 않다고 느끼는 모든 종류의 불균형감의 원인을 심도 있게 고민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맞춰진 듯한 깔끔한 산미, 적당한 무게감 덕분에 최고의 밸런스로 평가받는 원두, 콜롬비아 수프리모. 깨어나고 싶지 않은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는 시기에는 어김없이 콜롬비아 수프리모를 고른다. 모난 구석이 없고 치우쳐지지 않은 이 한잔의 원두커피처럼 흔들림 없이 이대로만 머물며 행복의 관성을 유지하고 싶어서. 여유와 사색을 가져다 줄 몇 권의 책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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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균형은 외부힘의 평형상태를 전제로 하는 관성과도 참 관계가 깊은 듯하다. 인생에 있어서도 행복에 대한 관성은 외부힘의 합력이 0인 균형 잡힌 삶을 전제로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균형을 되찾으라는 몸의 신호는 행복의 관성을 위한 매우 합당한 자연의 운동법칙을 따르는 셈.
오늘의 당신은 어떤 기분인가요? 나로 대변되는 우리의 일상에서 당신의 기분을 헤아려봅니다. 여러분의 지나간 사연이 누군가에겐 현재의 모습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밥을, 옷을, 공간을, 곡을 때로는 한숨을 가지고 당신의 글을 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