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수 없는 소풍, 쾌유 기원
병원비를 결제하고 아직 따뜻한 아이를 담요에 감싸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퇴근하기까지 아이를 잘 두고 싶어서 근처 문구점과 다이소를 들렀지만 아이가 담길 정도로 큰 상자는 없었다. 투명하고 큰 아크릴 박스를 사서 부직포를 깔고 장난감과 함께 아이를 눕혔다. 아이는 여전히 미동 없이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먼저 간 짜장이를 인사시키고 마지막 목욕을 시키고 침대에 함께 누워 시간을 보냈다. 근처에 반려동물 화장터를 예약했고 회사에 상황을 말한 뒤 일찍 퇴근한 남편과 장례식장에 갔다. 이미 짧은 시간의 병원비가 50만 원 이상 나왔고, 장례식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해준 것이 너무 없어, 마지막이라도 좋은 걸 해주고 싶다며 기본에서 두 번이나 업그레이드된 상품을 선택했다. 유골함을 집에 두기엔 관리가 힘들었고, 마땅히 묻을 곳도 없어 또 금액을 추가해 메모리얼 스톤을 만들기로 했다.
짜장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시간 동안 짧고 굵게 울었다. 남편은 끝없이 울고 나는 울음을 그쳤다. 빨간 실을 손에 묶어주고 약간의 털을 잘라 챙기고 편지를 쓰고 사랑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아이를 보냈다. 장례식장은 사람의 장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조문객이 없고 식사가 없고 조용하다 뿐이지 정성을 다해 아이를 대해주셨고, 화장시키기 전에 남은 가족을 향해 인사를 해주는 모습도 비슷했다. 이미 짧은 시간 동안 소중한 사람을 여럿 보냈지만, ‘마음으로 낳았다’라고 말을 하던 정말 내 “새끼”를 보낸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할머니를 보내며 더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 미안했지만, 정말 오롯이 나만 바라보던 내 아이를 보낸 상실감은 어쩌면 그보다도 더 컸다. 반려동물이 없는 사람들, 혹은 반려동물이 있더라도 ‘그래도 어떻게 강아지가 사람보다?’라고 할 수 있지만 각자 느끼는 슬픔의 크기는 모두 다르다. 난 아직도 할아버지, 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마무리하지 못했고 또 하나의 슬픔이 생겼다. 어딘가 아프더라도 말도 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나만 바라보다가 내 첫 강아지는 그렇게 소풍을 떠났다.
화장을 마치고 메모리얼 스톤을 제작하는 동안 꽤 시간이 필요했다. 7시도 되지 않아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모든 걸 마치고 나온 시간은 10시였다. 보통 아팠던 아이들의 스톤은 색이 초록에 가깝다고 한다. 짜장이는 아주 예쁜 하늘색이 되어 돌아왔다.
일이 있어 집에 올라와있던 엄마와 남편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자기 위해 누웠다.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가 새벽 6시쯤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잠이 든 뒤에 남편은 출근을 했고, 엄마는 약속을 위해 나갔다. 오후에 눈을 뜬 뒤 남은 아이들을 챙기고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후 5시에 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평소와 다름없이 시작했고 새벽 2시에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짜장이의 사진과 스톤을 보며 “다녀왔어”라고 인사했다. 토요일 새벽 아르바이트는 늦게까지 술을 사거나, 혹은 술을 이미 마시고 돌아가는 사람들로 적당히 바쁘다. 너무 바쁘지도 않고, 너무 한가하지도 않아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다만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2시간은 너무 고요해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아이의 소식을 접한 지인의 연락에 오늘만은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마구 떠올라 끝없는 우울감에 잠식당했다. 손님이 오면 기계처럼 인사하고 입으로 웃고 일을 하는데 감당할 수 없는 흉포한 우울감이 밀려들어왔다. 무서웠다. 나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았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청소를 하고 일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또다시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월요일 아침, 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정신과에 갔다. 진료 시작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갔는데 사람은 북적였다. 처음 방문할 때만 해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아픈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이라 그런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기실이 북적거렸다. 10분 정도 짧은 시간 안에 대화를 하기는 어려웠다. 내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는 유일한 곳이었는데 뒤에 잔뜩 밀린 환자들을 받기 위해 대화가 뚝뚝 끊기는 느낌이라 어떻게 보면 더 커진 우울함을 안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학기가 시작했고, 정신없이 공부를 하며 한 주를 보냈다.
그리고 오늘 9월 2일 월요일. 아이의 첫 번째 추적검사가 있는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인지 사고도 많고 월요일이라 차도 많아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려 병원에 도착했다. 5-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미리 연락했지만 다행히 정각에 도착했고 검사는 시작됐다. 마취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아이를 기다리는 영겁의 시간이 지났다. “검사는 잘 끝났어요.”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에 안도를 하고, 주치의 선생님과 상담을 진행했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 방사선 치료 종료 직후,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지금 아이의 뇌종양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그로 인해 생겼던 부종들도 사라졌다. 피검사도 모두 정상수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냥 한마디로 “정말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스테로이드도 단약을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를 반복하고 대기실에 나와 남편에게 소식을 전했다. 수액을 다 맞고 나오는 아이를 보며 너무 고생했다고 안아주고 사랑해 주고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태까지 병원에 다니던 그 어느 날보다 금방 돌아왔다. 체감하는 시간뿐 아니라 ‘정말로’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침대에 누워 아주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낮잠을 잤다. 한 아이는 소풍을 갔는데, 먼저 소풍 가려던 아이는 건강해지고 있다. 소풍 간 짜장이가 그래도 아빠라고, 자기의 첫 아이라고 남은 생명을 나눠주고 갔으려나,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3개월 후 두 번째 추적검사를 하기 전까지 아이의 상태를 더 지켜봐야 하지만, 건강하게 더 오랜 시간 내 옆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평균적인 사람의 수명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 테지만 남은 시간 동안 남은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리라, 더 좋은 엄마가 되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