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상태는 치료가 끝나도 지켜봐야 한다
치료가 거듭될수록 아이의 상태는 나아지고 있었다. 분명 육안으로 보거나 내가 느끼는 상태는 좋았다. 8kg 정도까지 빠졌던 살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고 산책도 잘하고 밥도 잘 먹었다. 치료가 끝나면 마취에서 덜 깬 듯 비몽사몽 안겨 나오던 아이는 이제 걸어서 나오고, 내가 부르면 뛰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 발작을 다시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이의 뒤척임에 숨소리에 늘 잠을 설치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더해 거의 6시간씩 걸리는 외출은 적응이 되는 것 같다가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워낙 밖을 나가지 않는 사람인 데다가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로 있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원래도 불면증이 있었지만 수면제를 먹을 수도 없었고, 더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살이 계속 빠지고 있었다.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로 꽤 힘든 10-20대를 보냈던 나는, 스트레스를 조절하기 시작했고 딱히 ‘스트레스’라는 것을 받지 않기 시작한 30대 이후로 크게 아픈 적은 없었다(물론 원인 모를 명치 쪽 통증으로 응급실에 2번 가고 진료를 받았으나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기는 했다). 아이의 치료를 다니면서 정신적, 그러니까 감정적인 압박이 크다 보니 신체에서 영향이 나타나는 듯했다. 밥을 많이 먹어도 살이 빠지고, 잊고 지냈던 편두통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아이의 상태는 치료가 끝나봐야 알 수 있고, 그것도 3, 6, 9개월 단위로 MRI를 찍으며 지켜봐야 한다. 병원을 다니는 시간만 줄어들 뿐이지, 여전히 잠을 설치는 일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먹는 약이 한가득이고 식사도 구토나 설사를 방지하기 위해 처방식인 소화기 사료를 먹여야 했다. 아직 약간의 치료가 남아있는 지금, 난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늘, 여전히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잠을 잘 자는 사람이라 새벽에 돌아다니는 아이의 소리에 이미 적응을 한 듯, 너무나도 잘 자는데 그것마저 얄밉게 보였다. 하지만 아이의 병원비나 생활비를 모두 남편이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을 갖자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 마음들이 나를 골병들게 하고 있었다.
모든 고민들을 다 던져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다른 고민들이 생겨났다. 내 몸이 아프면 아이 치료에 영향이 생길 텐데, 어떻게 날 관리해야 하는지도 걱정됐다. 하나의 걱정은 점점 더 큰 걱정을 불러오고, 그 걱정들이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저 아이가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건 내 머리에서는 불가능한 일일까. 고작 12회의 치료인데 2주 정도의 시간뿐인데 이렇게 내가 망가지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아이에게 좋은 엄마이지 않은 걸까 라는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믿지 않는다. 내 슬픔이나 걱정을 정말 오롯이 공감해 주거나 이해해 줄 사람은 없다. 그저 각자의 마음과 시선에서 바라보고 위로할 뿐이다. 우울감과 걱정은 불어나고 또 불어난다. 한 방울의 물 같았던 걱정은 어느새 모여서 작은 웅덩이가 되었다가,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었다. 곧 이 걱정은 바다처럼 커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 예감은 적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