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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군 Oct 11. 2023

물랑루즈


좋아하는 영화가 있나요?


저는 이 질문에 항상 ‘물랑루즈’와 ‘라라랜드’라고 답해요. 어쩜 물랑루즈란 환상에 갇힌 채 라라랜드란 꿈과 희망을 쫓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두 영화 다 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엘튼존의 - your song은 처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를 다 외운 팝송이고, lalaland를 본 그날은 점심 메뉴까지 기억이 날 정도니까요.


왕가위 감독이 한국에 와 한 말이 있죠.

누구랑 어떤 길을 걸어서 어떻게 보고 나왔는지까지가 영화의 완성이라고. 어떤 순간 어떤 감정으로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서 완벽한 영화가 될 수 있다고.


그런 영화가 있으신지요?




한국에서 알아보고 간 건 비행기표와 물랑루즈 티켓 딱 이 두 개였다. PSG 경기와 물랑루즈 둘 다 보고 싶었지만 부담되는 가격에 이 두 개를 저울질했고, 이강인의 부상소식에 물랑루즈 쇼를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완희형과 나는 아침부터 쇼를 볼 기대감에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완희형의 머리를 깔끔하게 상륙돌격형으로 깎아줬고, 우리는 멀쑥하게 셔츠를 입은 채로 나왔다. 난 단추를 두 개나 풀었다.

뛸르히 공원에 앉아 크레페와 커피, 와인을 마시며 완희형에게 루브르, 뛸르히, 콩코르드 광장을 넘어 샹젤리제거리와 개선문까지의 길이 이어지는 역사에 대해 들었다. 공짜 수업이라 그런지 머리에서도 ‘꽁’ 하고 사라저 버렸다.

바람도 구름도 그리고 우릴 비치는 햇살도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었다. 반짝였지만 눈부시지 않았고 구름이 드리워도 선명했다. 잠깐 비가 왔지만 이마저도 시원했고, 비 온 뒤 갠 하늘과 구름 사이로 비친 햇빛은 신성하게까지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아까 공부했던 거리를 걷고, 개선문을 지나 에펠 근처의 프랑스 식당으로 갔다.

스타이즈본의 레이디 가가보다 더 아름다운 종업원이 웃으며 우리를 반겨줬다. 나는 ‘gorgeous’라고 서희는 ‘beautiful’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녀는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드는 미소로 우리를 응대했다. 달팽이와 푸아그라. 생경한 음식도 먹고, 비프부르기뇽보다는 갈비찜이 내 입맛에 맞는 단것도 느끼다 순간 ‘아 나 그냥 여기 살아야겠다’란 생각을 했다.


한바탕 비가 왔고, 추워진 날씨에 서희는 목도리와 팔토시를 완희형에게 빌려줬다. 작은 팔토시를 형의 손목에 끼우는 모습이 마치 경찰과 도둑 같아서 배를 잡고 웃었다.


물랑루즈쇼 자체는 실망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붉은 풍차 안의 극장에서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과 샴페인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관람하는 쇼는 매우 특별했다. 우리 테이블에는 에스파냐에서 온 모녀, 스코틀랜드에서 온 모녀, 우리 이렇게 여섯이었는데 스코틀랜드에서 오신 어머니는 우리 할머니 또래였다. 스코틀그랜마는 나에게 샴페인을 계속 따라주셨고, 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청년답게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 고개를 돌려 마셨다. 재밌어하셨다. 더 즐겁게 같이 놀아드릴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에게 환상이다. 물랑루즈는, 여전히.


아직도 그날의 바람이, 거리가, 사소한 것들이 기억나고 느껴지는 걸 보니 그 순간 난 살아있었구나 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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