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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연 Mar 22. 2023

흔적들로부터의 해방

언제 완성될지 모를, 나의 해방일지

한번도 타 본적 없는 번호의 버스를 잡아 타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동네로 향해서

다람쥐처럼 간간히 들락거리고 싶다.

아는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는 새로운 곳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길거리를 쏘다니고 싶다.

무작정 터미널로 가서 미리 예매하지 않은 표를 사고

사진이 목적이 아닌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다녀갔었다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벼우면서 자유롭게,

두 볼에 스치는 미풍처럼 돌아다니고 싶다.


아무도, 아무것도 내 발걸음을 막지 않고

나의 어떤 행적도 기록에 남기지 않고, 올리지도 않고,

지나가다 눈에 띄는 아무 음식점에 들어가

메뉴판 구석의 아무 메뉴를 주문하고,

네비게이션을 켜서 들여다보는 대신

길에서의 기약 없는 헤매임을 선택하는,

오늘 들어야 하는 수업도 내일 제출해야 하는 과제도

몇 시까지 돌아가야만 하는 시간도 없는,

메마른 일상과 짜여진 일정과는 완벽하게 동떨어진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런 곳에서라면

내가 세상에 태어나 남긴 어떤 흔적도 발자취도

헛되이 보낸 시간과 낭비한 수많은 순간도

감당 못할만큼 벌려놓은 일들과

이미 저질러버린 크고 작은 실수도

모두 떨쳐낼 수 있겠지,

내 마음에서 완전히 분리되겠지

아무 증거도, 기억하는 사람 하나 없다고 하더라도,

결코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 지나간 사건과 시간들.

그것이 내게 남긴 자국과 기억들, 쌓여서 지금의 나를 이룬 것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사랑한 흔적

상처받고 상처입힌 흔적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

나태하게 살았던 흔적

그 모든 글과 사진, 잡다한 물건들,

증명서와 성적표, 수많은 숫자들

사소한 습관들과 사소하지 않은 강박

얼굴에 자리잡은 미세한 주름살

손발 구석구석 배긴 굳은살

오랫동안 조여 생긴 속옷 자국

그 아래에 있는

나를 저주하고 증오했던 가로줄

나를 사랑하려 노력했던 세로줄


그 흔적들로부터 해방된 나도 내가 될 수 있을지,

나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

젠가처럼 숭숭 구멍 뚫린 채로 위태롭게 서 있다가

얼마 못 가 와르르 붕괴하는건 아닐지,

그 잔해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해방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지

그게 궁금해.

어쩌면 오늘의 나를 만드는 것은 어제의 내가,

지난날의 내가 남긴 흔적들

태엽 감아 놓은 자동인형처럼

과거의 내가 시키는 대로 살다가

가끔 고만고만한 일탈을 추구하고

미래의 나를 위해 다시 태엽을 감는 그런 나날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흔적들로부터의 해방

매일 밤 잠들며 죽음을 맞이하고

다음날 눈을 뜬 순간 주어지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

누군가는 하루살이 인생이라 부르겠지만

내게 정말로 과거의 흔적들로부터 자유로운 하루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오늘 밤 숨이 멎는 것을 선택하겠지


아아

우주에서 내 존재가 그러하듯이

정말로 딱 하루씩만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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