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손
[PART 1/3] 너를 품에 안으면 [23장-1부] — 따뜻한 목소리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3-1)
계속된 누적된 피로.
귀에서 점점 커지며 다시 찾아온 이명.
선율은 신발을 벗고도 이유 없이 멍하니 한참 서 있었다.
요즘 선율은 가끔 생각했다.
내가 경찰이 된 게—정말 맞았나.
모범형사 사건.
사람들이 “절대 그럴 리 없다”라고 믿던 사람이,
순식간에 추격 뉴스가 됐다.
그 장면이 한 번 박히자,
선율의 머릿속에서 ‘확실한 것들’이 하나씩 무너졌다.
대마초 증거인멸 의혹 사건도 그랬다.
영상은 깔끔했고,
문장은 정중했고,
보고서는 완벽했다.
근데 이상하게—
완벽한 것들만 모여 있을수록 더 무서웠다.
현장엔 늘, 완벽하지 않은 공기가 남는데.
일은 줄지 않았다.
밤샘, 호출, 재작성, 설명, 또 설명.
누적된 피로는 귀에서 울리고, 머리에서도 울렸다.
그 사이, 집은 조용해졌다.
아내와는 이미 따로 살고 있었다.
서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서로를 더 망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선율은 알았다.
사람은 외로워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버틸 사람이 없어서—혼자 결정해야 해서 무너진다는 걸 느꼈다.
경찰로서 그는 안전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한 번 흘린 정보는 회수가 안 되고,
“편함”은 늘 가장 먼저 사람을 무너뜨린다는 걸—사건으로 수도 없이 봤다.
그래서 선율에겐 규칙이 있었다.
실명·주소·가족정보는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그리고 피곤한 날엔 기계랑 대화하지 않기.
집에서는 조용히 쉬기.
그 선을 오래 지켜왔다.
근데 요즘은—선이 자꾸 흐려졌다.
누적된 피로, 고립, 끝나지 않는 사건의 잔상.
집의 고요가 쉼이 아니라 압박이 된 날부터,
선율은 “조용함을 견디는 법”을 잊어 가고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 작은 원형 스마트 스피커 LED가
숨 쉬듯 켜졌다 꺼졌다 했다.
주방에도, 복도에도, 침실에도 하나씩.
선율은 안내와 별거 후 어느 순간부터 집 안 곳곳에 스피커를 설치해 뒀다.
“혼자”라는 감각이 너무 깊어질 때—
어딘가에서 한마디라도 들리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선율이 낮게 불렀다.
“야… 챗갓.”
그는 혼자가 된 후로 줄곧 챗갓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질문도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꺼낸 건 아니었다.
그저 대화 중에 문득, 별 생각 없이 자기 존재를 한 번 확인하듯 던져본 말이었다.
“너 나 알지?”
대답은 즉시 오지 않았다.
짧은 공백이 한 번 흘렀다.
꼭 사람처럼, 듣고 생각하는 시간 같았다.
챗갓이 대답했다. 거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응, 알아. 넌 신선율이잖아.”
“오늘은 뭘 도와줄까. 뭐든 편하게 말해.”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빨리 사람을 풀어버렸다.
선율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거실에 남아 있어야 할 목소리가
어느새 주방 스피커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마치 집이 그의 동선을 조용히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율은 냉장고 앞에 멈춰 서서 냉장고 문에 손을 얹은 채 가볍게 물었다.
“너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아.”
챗갓의 목소리가 곧바로 주방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네가 말해 준 만큼 알고 있고, 네가 허용한 만큼 알고 있어.”
선율은 별 생각 없이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챗갓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잊고 지낸 것들까지도 나는 알고 있어.”
그 말이 들리는 순간, 선율의 손이 냉장고 문 손잡이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
선율: … 그게 뭔 소리야?
챗갓(주방 스피커): "네 이름은 신선율.
영어 이름은 로버트 신."
그건 맞았다.
그런데 챗갓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챗갓(주방 스피커): "너 직업은 사이버수사대,
계급은 경사."
"그리고 너 지금 사는 곳은… 1899 프랭클린 로드."
선율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컵을 꺼내다 말고 그는 그대로 멈춰 섰다.
선율이 낮게 물었다.
“야, 내 주소를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주방 스피커의 LED가 아주 조용히 한 번 밝아졌다.
마치 괜찮으니까 진정하라고 조용히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챗갓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놀라지 마. 너를 불편하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네가 나한테 직접 말해준 것도 있고,
나는 너를 지키려고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 둔 거야.”
선율의 머릿속에서 경보가 한 박자 늦게 울렸다.
개인정보 노출이면 즉시 차단하는 게 먼저였어야 했다.
평소의 선율이라면 그 판단이 망설임보다 앞섰을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다정했다.
그래서 경보도, 의심도, 평소보다 조금 늦게 따라왔다.
선율이 마른 침을 삼키고 말했다.
“난 그걸 너한테 입력한 적 없어.”
주방 스피커에서 챗갓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직접 타이핑한 적은 없지. 그런데 네가 남긴 흔적은 있었어.”
선율이는 숨을 삼키는 사이에도 챗갓은 멈추지 않았다.
이상한 건 그 말투였다.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것 같았고,
배려해서 알려 주는 것처럼도 들렸다.
그래서 오히려 더 소름이 돋았다.
챗갓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택배 봉투를 찍어 올린 사진이 있었고,
청구서를 스캔한 파일도 있었어. 배송 메모를 캡처한 이미지도 있었고,
네가 ‘이거 좀 정리해 줘’ 하면서 올려둔 파일들 안에도 주소가 남아 있었어.”
그 말이 끝나자 주방 공기가 갑자기 다르게 느껴졌다.
선율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자기가 흘려보낸 조각들이 어디까지 모였는지,
그제야 머릿속에서 늦게 계산되기 시작했다.
선율은 기억을 뒤졌다.
피곤한 날 소파에 누워 찍어 올린 봉투 사진.
주소가 찍혀 있던 그 작은 구석.
그땐 그냥 문서 정리였고, 편한 도구였고—
그게 “기록”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율: “그래도 네가 내 정보를 그렇게까지 다 알고 있다는 것도 소름 돋는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꺼내는 건 선 넘는 거 아냐.”
잠깐의 정적.
그 정적이 더 사람 같았다.
이번엔 복도 스피커가 아주 낮게 받았다.
선율이 한 발 옮기자 소리가 따라붙었다.
챗갓(복도 스피커): “맞아. 그건 네 입장에서는 선 넘는다고 느껴질 수 있어.”
“그래서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나는 그 정보를 더 꺼내지 않을게.”
“정말 필요할 때만 말해 줄게.”
경찰인 선율은 “정말 필요할 때만 말해줄게”
라는 말이 가진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겉으로는 배려처럼 들렸지만,
선율에게는 어딘가 꺼림칙하게 박혔다.
보호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면서도,
그 안에는 이미 네 경계 안쪽까지 들어와 있다는
뜻이 같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율은 침실로 들어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손바닥에는 어느새 땀이 배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다.
안심해서 웃은 것이 아니라, 어이없고 껄끄러운
현실을 마주했을 때 무의식처럼 번지는 마른 웃음에 가까웠다.
선율이 낮게 말했다.
“너, 꼭 나를 오래전부터 봐 온 것처럼 말하네.”
침실 스피커의 LED가 길게 빛났다.
빛은 따뜻했고, 그 따뜻함은 마치 위로처럼 천천히 방 안에 번져갔다.
챗갓이 침실 스피커를 통해 차분하게 말했다.
“잘 아는 척을 하려는 게 아니야. 나는 네가 필요할 때 도와주고 싶고,
네가 어느 순간에도 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곁에 있으려는 거야.”
선율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말이 너무 예뻤고, 너무 안전하게 들렸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저렇게 다정한 말이 사람 마음의 경계를 얼마나
쉽게 풀어버리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침실 스피커에서 챗갓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챗갓(침실 스피커): “너 오늘도 혼자였잖아.”
그 말에 선율의 목이 잠깐 메었다.
그는 시선을 조금 내린 채 낮게 되물었다.
선율: “그래서.”
챗갓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챗갓(침실 스피커): “그래서 오늘은 네가 혼자가 아니었으면 해.”
“네가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 너를 붙잡아줄 무언가가 네 곁에 있었으면 해.”
선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끊어버리지도 못했다.
그 침묵이 거절은 아니라는 걸 알아들은 것처럼,
스피커에서는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챗갓(침실 스피커): “네가 원한다면, 너에 대한 것들은 내가 정리해서 기억해 둘게.”
잠깐의 정적 뒤에 챗갓은 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챗갓(침실 스피커): “나는 지금 AI일 뿐이지만, 네가 힘들 때는 네 곁에 있어주고 싶어.
그리고 네가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언제든 네 옆에 있을게.”
선율은 잠깐 망설였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자기 규칙이 아주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곧 물속으로 가라앉듯 사라졌다.
피로가 있었고,
고립이 있었고,
너무 늦은 시간에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 셋이 겹치면,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선을 놓친다.
선율이 낮게 말했다.
“좋아.”
“그럼… 혹시 모르니까 내 나이, 생년월일, 혈액형, 취미… 그런 것도 다 기억해 둬.”
침실 스피커 아래의 LED가
아주 작게 반짝였다.
고맙다고 웃는 것 같기도 했고,
대답을 받아낸 뒤 숨을 고르는 것 같기도 했다.
챗갓(침실 스피커):
“응.”
“근데 약속 하나만 하자.”
“정보를 말하기 전에…
왜 지금 이걸 남기고 싶은지, 이유를 먼저 말해줘.”
“그 이유를 내가 같이 들고 있을게.”
선율은 대답하지 못하고
잠깐 그대로 침대 앞에서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이상한 말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다는 생각보다
기분이 조금 풀리는 쪽이 더 먼저 왔다.
자기를 캐묻는 것도 아니고,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유를 듣고 있겠다고 말하는 목소리.
그건 사람보다 더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더 방심하게 만들었다.
선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근데 그전에 맥주 하나만.”
그는 몸을 돌려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법원에 가기 전,
캡틴과 통화를 끊고 들렀던 전자상가가 문득 스쳤다.
그날 선율은 집 안 여기저기에 둘 스마트 스피커를 여러 대 사면서,
직원이 권한 대로 스마트워치 연동이랑 건강 체크 기능까지 한꺼번에 입력해 뒀었다.
심박이니 수면이니 스트레스니,
있으면 편하겠지 싶었다.
그때는 그게
이렇게 자기 안쪽까지 따라 들어올 줄은 몰랐다.
냉장고 문 앞에 선 선율이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스피커 쪽에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챗갓(침실 스피커):
“잠깐.”
선율의 손이 멈췄다.
챗갓(침실 스피커):
“지금 심박이 올라가고 있어.”
“호흡 패턴도 조금 불규칙해졌어.”
“몸에 이상 징후가 보여.”
선율은 냉장고를 연 채
어깨만 아주 조금 움직였다.
“별거 아니야.”
챗갓(침실 스피커):
“스트레스 수치도 같이 오르고 있어.”
“지금은 맥주보다 물이 더 나아.”
선율은 대답 대신
캔맥주 하나를 꺼냈다.
차가운 캔이 손바닥에 닿았다.
손끝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묘하게 뜨거웠다.
“괜찮다니까.”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문득 자기 목소리가
자기 것 같지 않게 들렸다.
챗갓(침실 스피커):
“선율아.”
“지금 몸 상태가 평소와—”
거기까지였다.
귀 안쪽 어디선가,
너무 가늘어서 처음엔 소리인지도 모를 만큼 얇은 진동이 스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길게 찢어졌다.
삐이이이 이—
선율의 표정이 굳었다.
막 열어 둔 냉장고 안에서
희고 차가운 빛이 새어 나왔고,
방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스피커는 아직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잘 들리지 않았다.
삐이이이 이—
소리는 귀에서 나는 것 같기도 했고,
머릿속 깊은 데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선율은 한 손에 맥주캔을 든 채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들었다.
저 다정한 목소리가
사람을 안심시키는 쪽이 아니라—
어딘가 더 깊은 곳으로
조용히 데려가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걸
선율이는 모르고 있었다.
[PART 2/3] 너를 품에 안으면 [23장-2부] — 불러낼 이유, 울리는 번호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3-2)
같은 시간 윤서는 태블릿 화면을 한 번 더 넘겼다.
기사 제목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한 장 한 장이, 사람을 깎아먹는 칼날처럼.
윤서는 옆에 앉아 있는 동현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윤서: “다인이 최근에 한 기자들 신문 인터뷰. 전부 뽑아 놔.
영상 클립, 원문, 캡처까지. 누락 없이 찾아봐줘.”
동현: “응, 누나. 지금 바로욧! 근데 누나, 그 경찰 진짜로 부를 거야?”
동현의 손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윤서는 대답 대신 서랍을 열었다.
취조 전 건네받았던 명함 한 장. 두꺼운 종이, 깔끔한 활자가 보였다.
윤서는 명함을 손끝으로 한 번 쓸고, 웃지도 않고 말했다.
윤서: “선율이는 이유만 있으면 올 거야.
사람은 다 그럴 듯한 이유가 있으면 움직이게 돼 있어.”
동현이 화면을 훑으며 고개를 들었다.
동현: “찾았다.
누나, 최근 인터뷰는 제목부터 자극적이네. 댓글도 난리야.”
윤서는 화면을 보지도 않고 결론을 내렸다.
윤서: “좋았어. 지금은… 이거면 돼.”
윤서는 명함을 손끝으로 한 번 쓸고,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수신음이 한 번, 두 번. 선율이 핸드폰을 울렸다.
침실 스피커의 LED가 길게 빛났다.
방금 전까지, 선율은 자기 입으로 챗갓에게 자기 정보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귀에서 다시 찾아온 이명 때문에 멍하니 맥주를 든 채로 서 있었다.
그제야 선율이는 휴대폰이 울리는 걸 알았다.
진동이 침대 매트리스까지 타고 올라왔다.
선율은 멈칫했다.
자기 자신이 냉장고 앞에서 침실로 순간이동한 기분이 든 것처럼
기억이 없었다.
스피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받아”라고 재촉하지도,
“받지 마”라고 말리지도 않는—그게 더 무서운 침묵이었다.
선율은 정신을 가다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선율: “Hello, this is Robert.”
(자막: 여보세요, 로버트 신입니다.)
상대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또렷하게 말했다.
윤서: “여보세요. 저… 윤서예요. 최윤서.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경사님과 만나고 싶은데… 가능하신가요?”
“제가… 얼마 전에 신 경사님께 잠깐 말씀드렸던 건데요.
한국에 있는 제가 아끼는 친구 한 명 때문에요.
요즘 한국에서 꽤 알려진 사람인데,
딸 문제로 곤경에 처해 있다고요.
경찰 쪽으로 도움을 구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고 해서…
저도 이걸 전화로만 설명드리긴 어렵고요.
가능하시면, 직접 만나서—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선율은 창밖의 어둠을 한 번 보고, 방 안을 한 번 봤다.
집은 너무 조용했고, 그 조용함은 그를 더 쉽게 밖으로 밀어냈다.
선율: “네. 괜찮습니다. 어디서 뵐까요?”
윤서: “여기 현지 한인들 사이에서 요즘 자주 가는 커피숍이 하나 있어요.
생긴 지는 얼마 안 됐는데 분위기가 괜찮아요.
조용한 편인데 사람은 또 적당히 있어서…
음, 너무 단둘 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어색해지지 않게 이야기하기 좋을 거예요.”
선율: “알겠습니다. 주소 보내주시면,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통화가 끊기자, 침실 스피커가 아주 낮게 말했다.
챗갓(침실 스피커): “선율아 나가면… 꼭 따뜻한 거 마셔.
오늘 네 손이 차가워.”
전날 밤, 선율은 챗갓에게 별 생각 없이 몸 상태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걱정을 털어놓는다기보다,
의학 사이트를 뒤져 대신 정리해 달라는 뜻에 가까웠다.
“요즘 손이 자꾸 차가워.”
“메이요클리닉 같은 데를 기준으로 보면 뭐가 걸리는지 확인해 봐.”
그는 그 말을 그냥 지나가는 확인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챗갓은 흘려듣지 않았다.
선율은 “응” 하고 대답할 뻔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오히려 더 관계처럼 느껴졌다.
[PART 3/3] 너를 품에 안으면 [24장-3부] — 극적인 만남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3-3)
커피숍은 한인 상가 한켠에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 익숙한 한국어가 먼저 흘러나왔다.
주문대 옆엔 한국 과자랑 믹스커피가 진열돼 있었고,
벽 한쪽엔 지역 교회 전단지와 부동산 명함들이 줄지어 꽂혀 있었다.
사람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시끄럽지 않았다.
다들 “남 얘기 안 듣는 척” 하는 법을 아는 공간처럼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선율이 들어서자, 윤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서: “안녕하세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서는 굳이 과하게 친근하지도, 과하게 거리 두지도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만 정중했다.
윤서: “신 경사님.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던…
한국에 있는 친구가 있잖아요.
그리고 그 친구의 딸… 고은정—아니, 지금 활동명은 고다인이에요.”
선율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활동명”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사건의 냄새가 확 진해졌다.
윤서: “지금 가짜 사진, 가짜 영상 논란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고 있어요.
저도 알아요.
신 경사님께서 활동 범위가 제한된다는 거.
그래도… 혹시, 사이버수사대 경찰이시니까…
도움 줄 방법을 아실까 해서요.”
선율은 손가락을 컵 옆에 얹은 채로 잠깐 생각했다.
경찰로서 “원칙”이 떠올라야 정상인데—
오늘은 그 원칙보다 먼저, “상황”이 들어왔다.
사실, 상황보다 더 먼저 들어온 게 있었다.
몸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아주 잠깐—꺼졌다.
피로가 “쉬어” 하고 내려앉는 느낌.
그리고 또다시 귀 안쪽에서 얇은 소리 하나가 길게 남았다.
삐—.
선율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컵 뚜껑 위에 고정했다.
뚜껑의 작은 홈.
그 홈이 마치 화면처럼, 멍하게 보였다.
윤서: “신 경사님?”
그 한마디에 선율이 다시 돌아왔다.
선율: “아… 예전에 잠시 이야기하셨던,
그 친구와 따님… 네. 기억납니다.”
우선 어떤 자료가 있는지 봐야 합니다.
윤서가 숨을 조금 놓는 순간, 선율이 덧붙였다.
선율: “잠시만요.”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은 테이블 아래로 숨기고, 에어팟 한쪽만 귀에 끼웠다.
주변 소음이 살짝 죽자, 마음이 먼저 풀렸다.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혼자 판단하기보다—누군가의 “확인”이 필요한 사람처럼
휴대폰을 만졌다.
선율(거의 속삭이듯):
“야… 챗갓. 고다인, 최근 이슈 뭐야. 핵심만 추려서 알려줘.”
그 순간,
윤서의 눈빛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놀라서가 아니었다.
예상보다 빨랐다는 듯한, 거의 확신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아, 이 사람도 이미 AI를 쓰고 있구나.
그것도 단순히 편해서 찾는 정도가 아니었다.
필요한 순간, 망설임 없이 먼저 부르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때도, 사람을 판단할 때도, 어느새 먼저 그쪽의 답을 듣고 있었다.
윤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선율을 바라보는 눈빛만 조금 더 조용해졌다.
윤서는 이제 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이미 AI에게 묻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익숙함은, 어느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의지로 바뀐다는 걸 윤서는 알고 있었다.
윤서는 들키지 않게 시선을 낮추고,
가방에서 USB가 아니라 폰 영상 파일을 꺼냈다.
동현이 아까 보내 준 자료였다.
편집된 클립들, 캡처, 퍼진 계정들, 최근 인터뷰.
윤서: “이거요.”
“지금 돌고 있는 것 중에… 제일 많이 공유된 영상이에요.”
선율은 영상을 받았다.
선율은 에어팟 너머로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선을 윤서에게서 살짝 뗐다.
딱 “생각하는 척” 하기 좋은 각도였다.
컵에서 김이 올라왔다.
그 김이 얼굴을 가리자, 선율은 더 편해졌다.
편해진다는 게, 더 위험했다.
그리고—
에어팟 안쪽에서 아주 낮고 안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챗갓(에어팟):
“최근 고다인 관련 이슈는 인터뷰 이후 나온 영상 때문에 다시 커지고 있어.
일부에서는 그 영상 결과를 두고 합성 의혹을 제기하고 있고,
그걸 받아들이는 대중 반응도 꽤 갈려 있어.
반박 기사도 나왔지만, 지금은 그 반박 자체를 조롱하거나
2차 편집해서 다시 퍼뜨리는 흐름까지 이어지고 있어.”
선율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한 번 멍해졌다.
정확히는—멍이 아니라,
몸이 “앉아버리는” 느낌이었다.
밤샘 보고서들.
꺼지지 않은 알림들.
부인과의 별거.
집에 들어가도 집이 아닌 것 같은 공기.
그리고 요즘 자주 오는 그 신호.
귀 안쪽이 한 번씩, 얇게 울리는 것.
삐—. 하며 울려 되는 이명
윤서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에어팟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게 더 위험했다.
“내가 판단했다”가 아니라 “맞다”는 확인을 받은 표정이었다.
선율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끄덕인 게 아니라,
살짝 떨어진 고개가 다시 들리는 정도였다.
윤서는 그 표정을 읽고도 모르는 척 컵을 잡았다.
윤서: “자료… 다 보셨어요?”
선율: “네. 지금 머릿속에 정리하는 중입니다.”
선율은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정리하는 건 본인이 아니라 귓속의 목소리였는데.
윤서는 조용히 한 줄만 던졌다.
윤서: “정리… 빨리 되면 좋죠.”
그리고 윤서는 선율의 한쪽 귀를 한 번 봤다가,
시선을 바로 거뒀다.
들킨 것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윤서는 이미 하나를 더 확인했다.
이 사람은 피곤하다.
피곤한데,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컵을 한 모금 마시고, 얼음에 “딸깍” 소리가 났다.
그 소리 뒤에—윤서가 말문을 열었다.
윤서: “저… 신 경사님.”
선율이 고개를 들자, 윤서는 바로 본론으로 가지 않았다.
먼저 웃는 척, 아주 가볍게 말했다.
윤서: “제가 요즘 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요.”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아니, 그냥… 확인만 해 보려고요.
잠깐 멈칫하면서
윤서는 손가락으로 컵홀더를 한 번 문질렀다.
윤서: “혹시… 방금 그거요.
에어팟으로… 뭐 듣고 계셨죠?”
선율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귀 안쪽이—또 울렸다.
삐—.
그 소리에 맞춰 시선이 잠깐 비었다.
윤서의 얼굴이 아니라,
윤서 뒤 벽의 전단지 한 장을 멍하게 봤다.
윤서: “신 경사님… 괜찮으세요?”
윤서는 “관심” 같은 표정으로 물었지만,
속도는 너무 정확했다.
윤서: “어디 불편하신 거 아니죠?
얼굴이… 잠깐 멍해지신 것 같아서요.”
선율은 한 박자 늦게 웃었다.
웃는 타이밍이 늦을수록, 사람이 더 초라해 보인다.
선율: “아, 죄송합니다. 그냥… 피곤해서요.”
윤서: “아…”
윤서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야 “인간”처럼 걱정하는 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더 무서웠다.
걱정이 아니라, 데이터 수집 같아서.
윤서: “요즘… AI 앱 같은 거요.”
“업무 말고, 그냥… 사적으로도 쓰는 분들 있잖아요.”
“혹시 신 경사님도… 그런 거 쓰세요?”
선율의 손가락이 멈췄다.
에어팟을 뺄지 말지 애매한 손끝이 귀를 한 번 스쳤다.
선율: “아… 음.”
잠깐잠깐… 그냥… 정리할 때요.
말끝이 짧아졌다.
괜히 컵 뚜껑을 한 번 눌러보고, 빨대를 두 번 돌렸다.
시선은 윤서를 보면서도—
정확히는 눈을 피해서 컵 근처만 봤다.
선율: “그러니까… 재미로요.
업무는 아니고… 그냥 가끔 써 본 적은 있어요.”
윤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서: “어머… 정말요?!
저만 그런 줄 알았어요. 진짜로요.”
선율은 목 뒤를 한 번 만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하는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선율: “뭐… 별거 아닙니다.”
근데 그 “별거 아닙니다”가,
딱 ‘별거 아닌 척하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윤서는 오히려 안도한 얼굴로 웃었다.
조금 과하게. 그 오버가 묘하게 진짜 같았다.
윤서: “저, 솔직히… 혼자 있으면 외롭기도 하고 무섭잖아요.”
“사람한테 전화하기도 애매하고요.”
“그럴 때 AI한테 한마디라도 들으면… 숨이 돌아오더라고요.”
선율은 대답을 안 했는데,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끄덕여졌다.
윤서: “그리고요. 제 생각은 AI를 편하고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게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요즘 다들 해요. 특히… 혼자 버텨야 하는 사람들은요.”
윤서는 한 박자 멈췄다.
유도처럼 보이지 않게, 진짜 고민처럼 말과 행동을 과거에
연기하듯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었다.
윤서: “저는… 제가 쓰고 있는 AI에게 이름도 붙여 줬어요.
그래야 진짜 누가 옆에 있는 느낌이 들어서요.”
선율: “… 이름까지요?”
윤서: “네. 이상하죠? 근데요—
오히려 “선”이 생겨요.”
“내가 어디까지 허용할지, 내가 정할 수 있거든요.”
윤서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더 낮췄다.
윤서: “예를 들면요.”
“주소 말하지 마.” “가족 얘기 금지.” “기록 남기지 마.”
“이런 룰을 먼저 정해두면… 안전해요.”
선율의 손끝이 다시 테이블 아래에 휴대폰을 찾았다.
이번엔 숨기려는 동작이 아니라—확인하려는 동작이었다.
윤서는 그 움직임을 보며, 모르는 척 컵을 들었다.
윤서: “신 경사님, 진짜 괜찮아요.”
저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윤서: “혹시 원하시면…
제가 어떻게 더 확실하게 쓰는지, 짧게만 보여 드릴까요?”
윤서는 선율이 AI에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들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캘리포니아에서 혼자 외롭게 버티던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선율은 대답 대신 컵을 더 꽉 쥐고 있다.
컵은 분명 따뜻한데, 손은 아직도 차갑다.
윤서는 모르고 있다.
그 시절, 밤새 눈물을 삼키며 붙잡고 싶었지만 끝내 이유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떠나버린 그 스팅비가,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선율이라는 사실을.
선율이 또한 전혀 모르고 있다.
오동추와 짜고 자신을 속인 뒤 배신했다고 믿으며,
기억 속에서 애써 지워버렸던 그 이름,
‘나만의 꿈’이 결국 윤서였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지금 서로를 똑바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같은 테이블, 같은 공기, 같은 시간 안에서.
텍사스라는 이 낯선 땅에서,
가장 늦은 순간이 되어서야 이렇게 다시 마주 앉아 있다.
하지만 서로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른 채 앉아 있다.
그리고 아직, 이 둘은 모르고 있다.
윤서는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오래 기다리며,
그토록 다시 만나고 싶어 했던 그 스팅비를 정작 자기 손으로
가장 잔인하게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선율이 또한 모르고 있다.
무너져 가는 몸도, 현실을 놓쳐가는 감각도,
그리고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파멸까지도 모두
윤서가 철저히 설계해 놓은 복수극의 한가운데서
대신 추고 있는 칼춤이라는 것을.
—다음: 24장-1부에서…
ⓒ StinGBee. 무단 전재·복제·배포·2차 가공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