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9%

칼이 되는 순간

by 스팅비 StinGBee

[PART 1/4] 너를 품에 안으면 [22장-1부] — 99.99가 칼이 되는 순간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2-1)

법정은 차갑게 정돈돼 있었다.

모서리까지 딱 맞춘 세계.

여기서는
피로도, 의도도, 현장의 공기도
증거가 아니다.

증거는 오직
기록과 영상,
그리고 말뿐이었다.


법원1.png

선율은 증언대에 앉아 있었다.
정복이 아니라 정장.
총도, 배지도 없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지만
손끝은 차가웠다.


변호사:
“3년 전, 해당 피의자를 체포하고 병원 이송까지 담당했습니까?”

선율:
“네.”

변호사:
“당시 피의자가 병원에서 ‘대마초가 주머니에 있다’고 발언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선율:
“네.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자리로 돌아가 준비된 서류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증인석 앞으로 걸어왔다.

얼굴엔 미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미소가 아니었다.

문장을 죽이고,
진술을 자르는 미소였다.


변호사:
“Sergeant Shin.”
(자막: 신 경사.)
“좋습니다. 간단하게 가죠.”

그는 질문을 처음부터 예/아니오로 잘라 버렸다.

변호사:
“피의자는 병원 침대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죠?”

선율:
“네, 그렇습니다.”

변호사:
“피의자는 도망칠 수 없었죠?”

선율:
“네, 그렇습니다.”

변호사:
“어차피 구치소로 이송될 상황이었죠?”

선율:
“…네, 그렇습니다.”


변호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
“즉, 피의자는 도망칠 길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주머니에 대마초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까?”

선율:
“네.”

변호사는 손에 든 서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마치 이미 알고 있는 답을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변호사:
“그런데 동시에, 피의자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는 서류를 읽었다.

변호사:
“경찰이 제 바지 주머니에 고의로 넣었습니다.”
“과잉진압을 했고, 증거까지 심었습니다.”

법정 안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변호사는 그 소리를 즐기지 않았다.
굳이 부풀리지도 않았다.
대신, 더 조용한 목소리로
더 깊이 찔렀다.


변호사:
“Sergeant Shin.”
(자막: 신 경사.)
“당신은 이 주장에 대해 어떻게 답했습니까?”

선율:
“절차대로 기록을 남겼고, 입회자를 요청했습니다.”

변호사:
“좋습니다.”

그는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변호사:
“그럼 핵심으로 들어가죠.”

“당신은 병원 이송 전에 피의자의 바지 주머니를 수색했습니까?”

선율:
“했습니다.”

변호사:
“양쪽 다 수색했습니까?”

선율이 아주 잠깐 멈췄다.

선율: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변호사:
“아니오.”

변호사가 말을 끊었다.

변호사:
“질문은 간단합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공기를 가르듯 말했다.

변호사:
“바지 주머니를 확인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선율의 턱이 굳었다.

선율:
“확인했습니다.”

변호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변호사:
“그럼 당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때 주머니 안에는 대마초가 없었겠네요?”

선율:
“그렇습니다.”

변호사:
“좋아요.”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다음 문장을 던졌다.


변호사:
“그럼 그 대마초는 언제, 어디서 생겼습니까?”

선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변호사는 바로 그 침묵 위에 올라탔다.

변호사:
“당신이 수색했을 때는 없었고,”
“피의자는 병원에서 ‘있다’고 말했고,”
“그런데 그 물건은 현재—”

그는 서류를 탁 내려놓았다.


변호사:
“증거로 제출되지 않았습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그는 마치 정답을 읽어 주듯 말했다.

변호사:
“즉, 증거 경로에 공백이 있습니다.”

선율은 손끝이 식어가는 걸 느꼈다.

변호사는 그걸 본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변호사:
“Sergeant Shin.”
(자막: 신 경사.)
“당신은 리포트를 100% 정확히 쓰려고 노력합니까?”

선율은 잠깐 멈췄다.

이 질문은 단순해 보였지만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선율:
“네. 최대한 정확하게 씁니다.”

변호사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변호사:
“최대한.”

그는 그 단어를 천천히 한 번 되풀이했다.

변호사:
“방금 ‘최대한’이라고 하셨죠?”

선율:
“네.”

변호사:
“그 말은 100%는 아니라는 뜻입니까?”

선율은 침을 삼켰다.

선율:
“현장에선 모든 변수를—”

변호사:
“아니오.”

변호사가 다시 잘랐다.


이번에는 더 차갑고, 더 분명했다.

변호사:
“신 경사님, 여긴 현장이 아닙니다.”

그는 증언대 바로 아래에 섰다.

너무 가까워서
선율은 그 미소가 눈으로 웃는 게 아니라는 걸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변호사:
“당신은 리포트를 100% 정확하게 쓴다고 생각합니까?”

순간, 선율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숫자는
원래 자기 편이었다.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자기 안에서만 끝내던 안전한 숫자로 생각했었다.

99.99%면 됐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 정도면 누구보다 잘하고 있다고,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용서하던 숫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그 숫자가
법정에서,
적의 입에서,
칼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선율은 입을 열려 했지만 목 안이 먼저 바짝 말랐다.

셔츠 안쪽 겨드랑이로 식은땀이 번졌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땀이 한 줄기 미끄러져 내려갔다.


법원2.png

그리고 그때였다.

귀 안쪽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올라왔다.

삐—

처음엔 희미했다.
아주 가늘고, 멀고,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변호사가 눈앞에 선 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 있을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삐이이—


법정 안의 공기와
사람들 인기척과
의자가 바닥을 스치는 작은 소리들이
전부 그 얇은 울림 뒤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선율은 이를 악물었다.

호흡부터 잡아야 했다.
표정부터 무너지면 안 됐다.
정신을 붙들고, 질문을 다시 붙들고,
한 문장이라도 정확하게 내보내야 했다.


그 짧은 순간,
변호사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상대가 흔들렸다는 걸
눈치챈 사람의 눈이었다.

변호사는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직선적으로,
도망칠 틈조차 주지 않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변호사:
“신 경사님, 어렵게 돌려 말하지 마십시오.”

“리포트를 100% 정확하게 썼습니까, 아닙니까?”

선율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귀 안의 소리는 더 커졌다.

삐이이—

손끝 감각이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았지만
선율은 겨우 입을 열었다.


선율:
“… 저는 가능한 한—”

변호사:
“예, 아니오로 답하십시오.”

짧고 단호했다.

선율은 결국 말했다.

선율:
“…네. 최대한. 거의 100%.”

변호사는 마침내 기다리던 문장을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

“감사합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판사와 배심원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변호사:
“방금 증인 스스로 말했습니다.”

“거의 100%.”

“즉, 100%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검사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사:
“이의 있습니다. 왜곡입니다.”

판사는 표정을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판사:
“이의 기각합니다. 증인은 계속 답하십시오.”

변호사는 다시 선율 쪽으로 돌아섰다.

이제 목소리는 더 낮았고,
그래서 더 위협적이었다.


변호사:
“Sergeant Shin.”
(자막: 신 경사.)
“당신은 이 사건에서 대마초가 ‘증거로 제출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선율은 입술을 다물었다.

설명할 수 없다.

그건 선율의 의도가 아니었다.
선율이 넣지 않았다.


하지만 법정은
의도를 묻지 않는다.

법정이 묻는 건
항상 같은 것뿐이다.

누가 마지막으로 가졌나.

언제 봉투에 들어갔나,
누가 인계받았나.
기록이 왜 비어 있나.
그 공백을 누가 설명할 수 있나.

변호사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변호사:
“그럼 공백이 있네요.”

“인수인계 기록이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칼날을 꺼냈다.

변호사:
“그러면 가능한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변호사:
“하나.”

“당신이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가 접혔다.

변호사:
“둘.”

“누군가가 그 물건을 넣거나 빼거나 조작했습니다.”

두 번째 손가락도 접혔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아주 조용히 물었다.

변호사:
“피의자는 뭐라고 주장했죠?”

“경찰이 넣었다고 했습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변호사:
“Sergeant Shin.”
(자막: 신 경사.)
“당신은 당신이 말한 ‘99.99%’의 리포트로,

그 주장을 100% 막을 수 있습니까?”

선율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그 0.01%의 틈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 목을 조르고 있었다.


현장에서는 버틸 수 있었다.
피 냄새도, 욕설도, 몸싸움도, 체포도 버텼다.

그런데 법정은 달랐다.

여긴 총도 필요 없고,
주먹도 필요 없고,
피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대신 문장 하나면 된다.
숫자 하나면 된다.
빠진 기록 하나면 된다.

그리고 사람은

그걸로도 충분히 무너질 수 있었다.

선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율:
“… 아닙니다.”

변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아주 작고 선명한 미소였다.

변호사:
“이상입니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선율이는 그제야 더 법정에서의 현실을 알았다.

이 법정에서
자기가 싸우는 상대는
범인이 아니다.

자기의 기억도 아니다.


자기 이름이 찍힌
리포트 한 장.

그 한 장의 문장.

그 문장 안에 남은
0.01%의 틈.

그리고 그 틈은 오늘,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칼이 되어
결국 선율이 에게 돌아왔다.


[PART 2/4] 너를 품에 안으면 [22장-2부] — FTO 밀러의 증언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2-2)

법원3.png

다음으로 밀러 경사가 증언대에 앉는 순간,

공기가 조금 바뀌었다.

선율은 시선을 내렸다.

3년 전, 그 현장에서 바로 옆에 있던 사람.
그때도 지금도—절차를 아는 사람.

판사:
“증인은 성명과 당시 직무를 말씀하십시오.”

밀러 경사:

“당시 저는 현장에 출동한 Sergeant였습니다.”
(자막: 당시 현장에 출동한 경사였습니다.)

변호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도 조용했고, 목소리도 낮았다.

조용할수록 위험했다.


변호사:
“Sergeant Miller.”
(자막: 밀러 경사.)

“피고인이 제압된 뒤, 당신이 직접 상태를 확인했죠?”

밀러 경사:
“그렇습니다.”

변호사:
“그때 피고인은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까?”

밀러 경사:
“그렇게 보였습니다.”

변호사:
“‘그렇게 보였다’와 ‘실제로 의식이 없었다’는 다른 말이죠?”

밀러 경사:
“그렇습니다.”

변호사:
“그럼 묻겠습니다.
피고인은 실제로 의식이 없었던 겁니까,
아니면 그렇게 보이게 행동한 겁니까?”


밀러 경사가 숨을 한 번 고르고 답했다.

밀러 경사:
“제 판단으로는, 의식이 없는 척하고 있었습니다.”

법정 안이 아주 잠깐 술렁였다.

변호사:
“당신의 판단이요?”

밀러 경사:
“그렇습니다.”

변호사:
“그 판단의 근거는 뭡니까?”

밀러 경사:
“이름을 불렀고,
어깨를 흔들었고,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고,
통증 자극 반응도 확인했습니다.”


변호사:
“통증 자극이라면 sternum rub 말하는 겁니까?”
(자막: 흉골 자극 반응 확인 말입니까?)

밀러 경사:
“맞습니다.”

변호사:

“그 자극에 피고인은 반응했습니까?”

밀러 경사:
“했습니다.”

변호사:
“어떤 반응이었죠?”

밀러 경사: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통증 반응이 있었습니다.”


변호사가 손끝으로 서류를 한 번 짚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변호사:
“좋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 피고인은 자극을 느꼈고,
그 자극에 반응했다. 맞습니까?”

밀러 경사:
“그렇습니다.”

변호사:
“즉, 주변 자극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밀러 경사:
“통증 자극에 반응했다고 해서 완전한 의식 상태라고 단정할 수는—”

변호사:
“제 질문에만 답해 주세요.
인지하고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검사:
“Objection, calls for a medical conclusion.”
(자막: 이의 있습니다. 의학적 결론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판사:
“Overruled.”
(자막: 기각합니다.)

“증인은 아는 범위 내에서 답하십시오.”


밀러 경사의 턱이 잠깐 굳었다.

밀러 경사:
“통증에 대한 반응은 있었습니다.”

변호사:
“감사합니다.”


법원4.png “Overruled.”(자막: 기각합니다.)

그는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서류가 한 장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얇은 종이 소리였는데, 선율 귀에는 사람 목에 칼날이 얹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변호사:
“이제 병원으로 가보죠.”

“피고인은 병원 침대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자기 바지 주머니 안에 대마초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까?”

밀러 경사:
“그런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변호사:
“그리고 그 대마초는 자기 것이 아니고,
경찰이 고의로 넣었다고도 주장했죠?”

밀러 경사:
“그렇습니다.”

변호사가 아주 옅게 웃었다.
온기가 아니라, 미리 파둔 구덩이 위에 흙을 한 번 더 덮는 웃음이었다.

변호사:
“그 말을 했다는 건,
피고인이 말을 할 수 있었다는 뜻이고,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 아닙니까?”

밀러 경사:
“말은 했습니다.”

변호사:
“감사합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더 깊이 찔렀다.

변호사:
“그러면 현장에서는 의식이 없는 척했고,
병원에 가서는 경찰이 증거를 넣었다고 주장했다—
당신은 그렇게 판단한 거군요?”

밀러 경사:
“그의 행동을 토대로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변호사:
“‘판단.’”

변호사가 그 단어를 한 번 굴렸다.
마치 입안에서 맛을 보듯이.

변호사: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건 뭡니까?”

밀러 경사:
“행동 패턴입니다.”

변호사:
“구체적으로요.”

밀러 경사:
“반응을 숨기려 했고,
호흡을 조절하는 것처럼 보였고,
통증 자극에는 반응했고,
병원에서는 선택적으로 발언했습니다.”

변호사:
“‘선택적으로’라는 표현은 당신의 해석이죠?”

밀러 경사:
“제 관찰에 따른 판단입니다.”

변호사:
“좋습니다.”


그는 몇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앞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 낮았다.

변호사:
“그럼 이제 주머니 이야기를 해보죠.”

법정 공기가 한 번 더 가라앉았다.

변호사:
“당시 피고인의 바지 주머니를
병원 이송 전에 완전히 확인했습니까?”

밀러 경사:
“현장 안전 확보와 상황 통제 범위 안에서 확인했습니다.”

변호사:
“완전히 확인했습니까?”

밀러 경사가 잠깐 멈췄다.

밀러 경사:
“완전한 수색은 아니었습니다.”


그 한 문장이 떨어지는 순간,
선율은 느꼈다.

아.

저 한 줄이 지금 박혔다.

변호사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잡았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고개였다.

변호사:
“감사합니다.”

그는 말을 한 단어씩 잘라 넣었다.

변호사:
“그렇다면,
그 시점에,
피고인의 주머니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무엇이 없었는지,
당신은 지금 이 법정에서
100퍼센트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겠네요?”


밀러 경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이
법정에서는 이미 반쯤 답이 되어 버렸다.

판사:
“증인, 답하십시오.”

밀러 경사:
“100퍼센트라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변호사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
“No further questions.”
(자막: 이상입니다.)


법원5.png

선율은 숨을 삼켰다.

끝난 줄 알았는데, 검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검사:
“Redirect, Your Honor.”
(자막: 재신문하겠습니다, 재판장님.)

판사:
“진행하십시오.”

검사는 변호사처럼 미소를 짓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가 더 단단했다.
감정이 아니라, 정리된 순서로 들어왔다.

검사:
“밀러 경사, 몇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미성년자가 있었습니까?”

밀러 경사:
“있었습니다.”

검사:
“그 미성년자는 피고인에게서 즉시 분리해야 할 대상이었습니까?”

밀러 경사:
“그렇습니다.”

검사:
“당시 우선순위는 완전한 수색이었습니까,
아니면 아이 안전 확보와 피고인 통제, 구급대 인계였습니까?”

밀러 경사:
“아이 안전 확보, 피고인 통제, 구급대 인계가 우선이었습니다.”

검사:
“좋습니다.”

“당신이 ‘완전한 수색은 아니었다’고 답한 건,
경찰이 무언가를 넣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까?”

밀러 경사:
“아닙니다.”

검사:
“당시 현장 제약 때문에,
절차상 우선순위를 먼저 처리했다는 뜻입니까?”

밀러 경사:
“그렇습니다.”

검사가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검사:
“피고인이 병원에서 대마초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침대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습니까?”

밀러 경사:
“그렇습니다.”

검사:
“자발적으로 그 주제를 먼저 꺼낸 겁니까?”

밀러 경사:
“네.”

검사:
“이상입니다.”

“No further questions, Your Honor.”

(자막: 더 이상 질문 없습니다, 재판장님.)


밀러 경사가 증언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선율은 알았다.

3년 전 그 인간쓰레기 하나가
지금 이 법정에서
자기 하나가 아니라
조직 전체를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지금 선율의 계급이 경사가 되었든 아니든,
이건 진급으로 해결되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기록은
계급장을 보지 않는다.

법정에 서기 전,
싸움은 이미 시작돼 있었다.

아니—정확히 말하면
총도, 고함도, 체포도 없이
서류와 영상만으로
사람이 먼저 한 번 죽고,
한 번 더 살아나는 싸움이 먼저 열린다.


검사도 변호사도
법정에서 “말”로 싸우기 전에
먼저 프레임으로 싸운다.

바디캠.

그리고 현장에 있던 네 명.

각자 가슴에 달린 카메라에서 나온
네 개의 시점.

같은 사건인데도
각도는 달랐다.

누군가는 피고인의 오른손을 봤고,
누군가는 아이의 얼굴만 봤고,

누군가는 선율의 어깨 너머로 피고인의 허리 쪽만 봤다.

그 차이가
사람 하나를 범죄자로 더 깊이 밀어 넣을 수도 있었고,
반대로 경찰 하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도 있었다.


법원6.png

검찰청 회의실.

모니터가 네 대 켜져 있었다.

네, 화면이 동시에 재생됐다.

어떤 화면에서는
선율이 “아이 내려놔”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였고,
다른 화면에서는
딱 그 순간 선율의 어깨가 프레임을 가렸다.

검사가 리모컨을 눌렀다.

정지.
되감기.
정지.
0.5배속.

검사:
“여기.”

검사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짚었다.


검사:
“이 프레임에서 손이 어디로 가?”

옆에 앉은 수사관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수사관:
“허리 쪽입니다.
주머니 라인으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검사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검사:
“‘보인다’ 말고.”

그리고 종이를 툭 펼쳤다.

검사:
“리포트 문장을 다시 봐.”

그는 읽었다.

검사:
“‘용의자의 양손이 시야에서 이탈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검사:
“이 문장, 영상이 받쳐 주냐?”

모두가 화면을 다시 봤다.

선율의 어깨가
딱 그 순간 프레임을 덮고 있었다.

검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검사:
“이 각도 하나로는 약해.”

“다른 바디캠 틀어봐.”

곧바로 다른 화면이 확대됐다.

아사드의 바디캠.
측면 각도였다.

그 화면에서는 손이 보였다.

허리로 가는 동작이—아주 짧게 포착되었다.

검사가 숨을 내쉬었다.

검사:
“좋아.
이건 쓸 수 있겠다.”

그리고 바로 덧붙였다.


검사:
“근데 상대는 여기로 파고들어온다.”

“확실히 안 보인다고 할 거고,
가려졌다고 할 거고,
그 틈에 ‘조작’이라는 단어를 넣을 거야.”

다음은 무전 로그와 CAD였다.

체포 시각.
테이저 사용 시각.
구급대 요청 시각.
병원 도착 시각.

시간이 20초씩, 30초씩
겹쳐졌다.

검사:

“리포트 시각하고 1초라도 안 맞으면
상대는 바로 ‘기억이 틀렸다’로 판을 바꾼다.”


그리고 그다음이 진짜 싸움이었다.

대마초.

검사가 서류를 넘겼다.

검사:
“병원에서 피고인이
‘주머니에 대마초가 있다’고 말한 시각—
그 발언 어느 카메라에 잡혔지?”

수사관이 고개를 저었다.

수사관:
“병실 안은 촬영 제한 때문에 영상은 없습니다.
오디오 일부만 확인됩니다.”

검사의 턱이 굳었다.

검사:
“음…, 오디오만 확인이 된다…”


짧은 침묵.

검사:
“그럼 우리는 이 기록 한 줄로 버텨야 한다.”

그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검사:
“‘피고인은 침대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주머니에 금지물이 있다고 발언했으며,
해당 금지물은 본인 소유가 아니고
경찰이 고의로 넣었다고 주장했다.’”

검사가 낮게 말했다.

검사:
“이 문장, 단어 하나만 잘못 써도
내일은 그 현장에 있던 2명의 경찰관들은 증인석이 아니라
피고인석 근처까지 끌려간다.”


반대편도 똑같았다.

변호인 사무실.

모니터.
정지.
되감기.

변호인은 네 개의 바디캠을 동시에 틀어놓고
한 화면을 가리켰다.

변호사:
“여기.”

“손 안 보이죠?”


조수가 대답했다.

조수:
“선율 어깨에 가립니다.”

변호인이 웃었다.

변호사:
“그럼 됐어요.”

“안 보인다는 사실만 있으면 돼요.”

“안 보인 틈은 늘 가능성이 되고,
가능성은 결국 합리적 의심이 됩니다.”

그는 리포트를 펼쳤다.

변호사:
“그리고 이 문장.”

손가락이 종이 위를 툭 쳤다.

변호사:
“‘양손이 시야에서 이탈했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선 손이 잠깐 보이기도 하죠.”


변호인이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변호사:
“같은 사건.
같은 시간.
같은 현장.”

“그런데 기록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조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변호사:
“그 차이가 뭘까요?”

“기억?
각도?
아니면 누군가가 나중에 덧댄 해석?”

조수가 숨을 삼켰다.


변호사가 마지막으로 낮게 말했다.

“법정은 우리에게는 완벽을 요구하지 않아요.”

“완벽한 입증이 필요한 쪽은 우리 아닙니다.

검사 측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

합리적 의심입니다.”


결국 법정에 올라오는 건
사건 자체가 아니었다.

일치 여부였다.

바디캠 네 개의 프레임이
리포트 한 줄을 받쳐주는지.


무전 20초가
보고서 시각과 맞는지.

선율의 어깨가
결정적인 순간
무엇을 가렸는지.

그 싸움이 끝난 뒤에야

사람들은 법정에서
마치 처음 싸우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선율은 알고 있었다.

진짜 재판은
이미 전날 밤
검사실과 변호사 사무실의 모니터 앞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걸.


재판이 끝나고,
선율은 법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밖은 평범했다.

햇빛도, 바람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평범했다.

그런데 선율의 머릿속은
아직도 화면 안에 갇혀 있었다.


프레임.
정지.
되감기.
0.5배속.

단 1초.

아니—
1초도 아니었다.

몇 프레임.

그 몇 프레임이
유죄와 무죄를 가르고,
경찰과 피고인을 흔들고,
한 인간의 인생을
어깨 하나, 각도 하나에 매달아 놓았다.


선율은 문득 생각했다.

이 정도면—

진실이 판결을 내리는 게 아니라
영상이 판결을 내리는 거잖아.

그리고 바로 다음 생각이
훨씬 더 무서웠다.

만약 누군가가
AI로 영상을 “살짝”만 바꿔치기한다면?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몇 프레임만
진짜처럼 건드린다면.

손이 주머니로 가는 장면을
조금 더 길게.

손이 멈추는 장면을
조금 더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타이밍을
0.3초 늦게.

얼굴 표정을
아주 미세하게 바꾸고,
그걸 원래 있던 장면처럼 덮어버린다면.


법정은 그걸
정말 잡아낼 수 있을까.

검사도, 변호사도
프레임을 확대해서 싸웠다.

하지만 그 싸움은
원본이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원본이 바뀌는 순간—

싸움의 바닥이 사라진다.

선율은 더 깊이 생각했다.

그걸 할 수 있는 건
단순한 사기범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범죄자는
돈 때문에 조작한다.

그런데 더 위험한 건

돈이 아니라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접근 권한.
보관 권한.
업로드 권한.
편집 권한.

누군가는 단 한 번만 손을 대면 된다.

“업로드 오류였다.”
“파일이 깨졌다.”
“다시 변환했다.”

그 말 몇 줄이면
원본은 어느 순간
새 원본으로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그 순간부터
증거는 증거가 아니라
권력이 된다.

선율은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몇 프레임이 사람을 흔들었다.

그럼 내일은?

몇 프레임이 아니라
몇 줄의 코드가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선율은 알았다.

이건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었다.

언젠가 반드시 터질 현실이었다.


[PART 3/4] 너를 품에 안으면 [22장-3부] — 원본을 만지는 손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2-3)
경찰서로 돌아오자마자

선율의 책상 위엔
하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BODYCAM AI REPORT GENERATOR
(자막: 바디캠 AI 리포트 자동 생성 시스템)

그 아래엔 짧은 문장 몇 개가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업무 효율 개선.”
“보고서 표준화.”
“작성 시간 단축.”
“오류 감소.”


선율은 종이를 들고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오류 감소.

그 문장이
이상하게 위협처럼 보였다.

오류가 줄어들면
그럼 책임도 줄어들까.

아니.

오류가 “보이지 않게” 되면
책임은 오히려 더 커진다.

선율은 종이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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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팀장이 지나가며 툭 던지듯 말했다.

“오후 늦게 신형 바디캠 데모한다. 가능한 한 모두가 참석하도록.”

“그리고 이건 위에서 밀고 있어.”

“기능이 좋대. 아주.”

“로버트 법원일로 수고 많았다. 그런데 쉬러 가기 전에 이건 꼭 보고 가.”

선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좋다’는 말은 늘 위험했다.

좋다고 말하는 순간,
검증이 멈추는 경우가 많아서.


회의실.

프로젝터가 켜지고

정면 스크린 위로 바디캠 영상이 떴다.

화면 아래에는
자동으로 텍스트가 따라붙고 있었다.

[AI AUTO-GENERATED REPORT SUMMARY]
(자막: AI 자동 생성 리포트 요약)

“피의자는 저항함.”
“경찰은 명령을 반복함.”
“사용한 강제력: 테이저.”
“피의자 안정화 후 이송.”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이거 좋네.”

“이제 리포트 쓰는 시간 엄청 줄겠는데.”

선율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 법정에서 이미 봤기 때문이다.


현실은
“저항함”이라는 단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저항은
손목이 돌아가는 각도고,
아이의 비명이고,
어깨가 프레임을 가리는 순간이고,
0.1초의 흔들림이다.

그걸 한 줄로 정리하는 순간
사건은 정리되는 게 아니라—
삭제된다.


발표자가 말을 이었다.

“이 시스템은 바디캠 영상을 기반으로
리포트 초안을 자동 작성합니다.”

“오타와 누락을 줄이고, 보고서 표준화를 통해—”

선율이 입을 열었다.

“기반이요?”

회의실의 시선이 한 번에 모였다.

선율은 발표자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기반이 뭡니까.
원본입니까, 변환본입니까.”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발표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원본을 업로드하면 시스템이 변환해서 처리합니다.”

선율이 다시 물었다.

“그 원본이 ‘원본’이라는 건
어떻게 보장하죠?”

발표자의 웃음이 눈에 띄게 얇아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선율은 말의 속도를 더 늦췄다.

“오늘 법정에서
프레임 몇 개로 유죄와 무죄가 갈렸습니다.”

“그런데 누가 AI로 프레임 몇 개만 살짝 건드리면—”

그는 한 박자 쉬었다.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죠.”

회의실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누군가는 의자를 조금 고쳐 앉았다.


선율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범죄자가 아니라—”

그가 낮게 말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면 더 쉽습니다.”

팀장이 선율을 힐끗 봤다.

지금 여기서 그 얘기하지 마.

말하지 않아도
그 눈빛은 그렇게 읽혔다.


하지만 선율은 멈추지 않았다.

“업로드 권한.”
“편집 권한.”
“보관 권한.”
“접근 로그.”

“누가 마지막으로 파일을 만졌는지.”

발표자가 말의 방향을 바꿨다.

“…그래서 저희는 무결성 검증도 제공합니다.”


선율이는 또 물었다.

“무결성 검증은
‘느낌’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습니까?”

발표자가 대답했다.

“네. 해시값으로 남습니다.”

“접근 로그도 확인 가능하고—”

그 순간, 선율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해시값.

로그.

그 단어들이
3년 전 병원 사건의 “인수인계 공백”과
너무 정확하게 겹쳐 보였다.


선율이는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럼 질문은 하나네요.”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 시스템에서 진짜 중요한 건
AI가 뭘 쓰느냐가 아니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가 원본에 손댈 수 있느냐죠.”

회의가 끝나고
선율은 복도로 나왔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다리 밑 사건 수사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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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eant Shin.”
(자막: 신 경사님.)

상대 목소리는 낮았고, 조심스러웠다.

다리 밑 사건 피의자 측 수색 영상 관련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파일 하나가… 이상합니다.”
(자막: 파일 하나가… 이상합니다.)

선율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하다는 게 어떤 의미죠.”

상대가 잠깐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시간 정보, 그러니까 타임스탬프가 한 번 튑니다.”

“그리고 메타데이터가… 수정된 흔적이 있습니다.”

“원본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선율은 눈을 감았다.

오늘 법정에서 느꼈던 ‘가능성’이
지금 전화기 너머에서
‘현실’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선율은 조용히 물었다.

“그 파일,
누가 마지막으로 만졌습니까.”

상대가 대답했다.

“… 그게 문제입니다.”

“접근 기록에 공백이 있어요.”


공백.

그 단어 하나가
선율 손목을 꽉 움켜쥐는 것 같았다.

선율이 다시 질문을 이어가려는 순간,
팀장이 앞을 가로막았다.

“로버트. 넌 오늘 할 만큼 했다.”

“법정에서도 아쉬운 건 있었지만,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그만하면 잘 버텼어.”

“나머지는 우리한테 맡기고
넌 우선 돌아가서 제대로 쉬다가 복귀해.”

“딴짓하지 말고 쉬어.”


선율은 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팀장의 목소리 톤이 단호하게 달라졌다.

“로버트, 여기서 그만.”

그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오히려 그게 더 단단했다.

“나도 증거를 누락하고 기록에 공백이 있는 건 의심된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직접 알아볼 테니
넌 이쯤에서 손 떼.”


그는 알았다.

이건 이제
사건이 아니었다.

싸움이
시작됐다는 신호였다.

선율은 복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전화기 화면은 이미 꺼졌는데,
단어들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시간이 한 번 튄다.
메타데이터가 바뀐 흔적.
접근 기록 공백.

그건 ‘밖에서’ 들어온 흔적이 아니었다.

문을 부순 게 아니라—
열쇠로 열고 들어온 흔적이었다.


권한 가진 손.

선율은 입안을 한 번 굴렸다.

혀끝이 서늘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런 공백은 보통
기계에서 생기지 않는다.

사람에서 생긴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말은
대부분
악인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자주—
겁먹은 인간을 뜻한다.


3년 전.

병원.

다리 밑 사건이 터진 그날 밤,
현장도 병원도
모든 게 겹쳐 돌아가고 있었다.

피의자는 들것 위에서
숨을 끊어 먹듯 중얼거렸다.

“주머니… 대마초… 있어…”

선율은 그날
자기 손으로 그걸 수거했다.

증거봉투에 넣고,
라벨을 붙이고,
케이스 넘버를 적고,
인계서 위에 펜을 눌러 썼다.

그리고 증거 담당 상급자에게 건넸다.


증거를 받았던 그 당시 상급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걸로 끝이어야 했다.

끝나야 맞았다.

하지만 그날은
너무 정신이 없었다.

호출이 겹치고,
서류가 쌓이고,
사람이 업무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업무가 사람을 끌고 다니던 밤이었다.

딱 그런 밤에
작은 봉투 하나는
사라질 수 있다.


임시 보관함.
차량 트렁크.
서류 더미.
증거물 카트.

어디든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없어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늘 늦다.

늦게 깨닫는 순간,
사람은 제일 먼저
자기 목을 만진다.

숨이 있나 확인하듯이.


상급자는 악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겁이 났을 뿐이다.

실수 하나가
경력 전체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사람.

그래서 그는
없어진 걸 찾는 쪽보다
없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쪽을 택한다.

공백을 메우고,
기록을 맞추고,
시간을—
조용히 움직인다.


한 번 손대면
그다음은 더 쉽다.

한 번 덮으면
다음에 덮을 것도 생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본은 더 이상
원본이 아니다.

선율은 오늘 회의실에서
자기 입으로 말했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면 더 쉽습니다.

그 말이
지금 여기서
현실이 되어 서 있었다.

시간이 튄다.


그건 단순 오류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맞춘’ 흔적이었다.

선율은 눈을 감았다.

오늘 법정에서 느낀 ‘가능성’이
3년 전의 ‘공백’과
하나로 겹쳐졌다.

그는 알았다.

이건 이제
사건이 아니다.

누가 먼저
원본에 손댄 손을 잡느냐의 싸움이다.

그 작은 실수 하나로
판결이 갈렸다.


그 인간쓰레기는
풀려나진 않았다.

하지만 형량이 줄어들었다.

유죄는 남았는데,
무게가 빠졌다.

증거는 충분하다고 했던 것들이
‘충분하지 않게’ 바뀌는 데
필요한 건
총도, 협박도 아니었다.

기록의 공백 하나.
영상의 시간 한 번.
원본을 만진 손끝.

그게
사람 하나의 시간을
바꿔 버렸다.


선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군가가 먼저 손댔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사실을 알고도
조용히 덮으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먼저 찾는 쪽이
살고,

먼저 덮이는 쪽이
끝난다.

선율은 복도 끝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재판은 끝났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원본을 만지는 손.

그 손을 잡지 못하면
다음엔 사건 하나가 아니라
사람 하나가 통째로 지워진다.

그리고 선율은
이미 너무 늦게 알아버린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PART 4/4] 너를 품에 안으면 [22장-4부] — 면역체와 흔들리는 선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2-4)

경찰서에서 나온 그날 밤,
선율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를 고가도로 위로 올렸다.

창문을 내리자
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는 시가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잠깐 붉게 피었다가
바람에 얇게 흔들렸다.


image.png

멀리서 다운타운이 보였다.
처음엔 작았다.

작은 불빛들이 모여 있는
점 같은 도시.

하지만 차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고,
면은—벽처럼 솟은 빌딩 숲이 됐다.

수많은 창문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멀리서 보면
그건 아름다웠다.

정돈된 불빛.
조용한 실루엣.
평온한 밤.


그런데 선율은 알고 있었다.
저 빌딩들 안으로 들어가면
평온은 껍데기라는 걸.

어느 창문 뒤에선
누군가가 울고,

어느 층에선
누군가가 거래를 하고,

어느 골목에선
누군가가 증거를 만지고 있다.


도시는 멈춘 적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 보일 때만
멈춘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선율은 시가를 한 번 더 깊게 빨아들였다.

귓속 어딘가에는
아직도 법정에서 시작된 그 얇은 삐—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변호사의 질문,
판사의 시선,
몇 프레임의 영상,
몇 줄의 문장.

그 짧은 것들이
사람 하나를 얼마나 쉽게 흔들 수 있는지
오늘 그는 똑똑히 봤다.


문득,
도시가 사람 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다.
아무 문제없어 보인다.

하지만 안에서는
단 한 순간도 완전히 조용한 적이 없다.

어딘가에선
무언가가 침입하고,
어딘가에선
그걸 막으려는 힘이 즉시 달려든다.


사람은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속에서는 늘 전쟁 중이다.

백혈구는 몸을 지킨다.
침입한 것을 찾아내고,
달려들고,
부수고,
삼킨다.

그게 없으면
몸은 무너진다.

하지만 방향을 잃는 순간,
그 방어는 자가면역이 된다.

지키던 힘이
어느 순간 자기 몸을 적이라고 착각하고
공격하기 시작한다.


선율은 그 생각을
법으로 옮겨 놓았다.

법도 같다.

법은 사회를 지킨다.
범죄를 막고,
피해자를 보호하고,
질서를 세운다.

없으면 무너진다.

하지만 남용되는 순간—
법은 보호가 아니라 공격이 된다.

권한이 정의가 아니라
무기가 된다.

그때부터 사회는
자기 자신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백혈구가 몸을 공격하듯,
권한이 시민을 공격한다.

선율은 고개를 들었다.

다운타운이 가까워졌다.
불빛은 더 선명해졌고,
빌딩들의 유리창은
차가운 별처럼 반짝였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더 무서웠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쉬지 않고 무언가가 싸우는 세계.


오늘 법정에서 그가 본 것도
결국 그 싸움의 한 조각이었다.

몇 프레임이 사람을 흔들고,
몇 단어가 삶을 가르고,
몇 초의 영상이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척하는 세계.

그리고 이제는
그 프레임 자체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살짝 바뀔 수도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선율은 시가 끝을 재로 털었다.
작은 불씨가 바람에 흔들리다가
금세 꺼졌다.

그는 생각했다.

균형이 필요하다.

너무 약하면
범죄가 도시를 먹는다.

너무 강하면
법이 도시를 먹는다.


법은 면역이다.

없으면 죽고,
과하면 망가진다.

그 둘 사이 어딘가—
겨우 버티는 얇은 선 위에서
도시는 살아 있고,
사람은 살아 있고,
그는 아직 경찰이었다.

그리고 그 선은
오늘도,
밤마다,
보이지 않게 흔들린다.

다운타운은
그 흔들림을 숨긴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다음: 23장-1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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